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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대체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가

by macrostar 2013.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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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라는 건 기본적으로 삐딱한 선을 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딱히 체제 붕괴를 노리진 않을 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현상 유지를 원하는 메인스트림과는 정겹게 지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패션신, 특히 하이엔드 패션신에 들어왔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그런 옷을 입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지금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가만히 있거나 아니면 아예 지금 상태가 더 강화되는 게 최선인 건 당연하다. 현재의 기반을 토대로 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변혁기에는 혹시나 특이한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이 블로그나 다른 지면을 통해 말해왔 듯 몇몇 서브컬쳐는 멀리 돌아와 하이엔드 패션신에 입성했다. 지방시를 비롯해 니콜라 포미체티, 빌헬름 번하드, 제레미 스캇, 톰 브라운, 겐조 등등의 브랜드들이 서브컬쳐의 요소를 콜라쥬하거나 또는 충실히 재현하기도 한다. 워낙 유행이 되다보니 고풍스러운 옷들은 가끔 고루해 보이고, 그런 이미지를 벗고자 하는 점잖은 디자이너 하우스에서도 심심찮게 그래픽 티셔츠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든 저러든 이런 것들은 비정치성을 지향하고 그래야만 한다. 이들이 그런 안락한 곳에서 벗어나 어떤 태도를 지니며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면 그건 그것대로 복잡하고 곤란하다.


와이지에 대해서도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지디의 레이어 겹치기는 이번 씨엘의 솔로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었다. 뮤직 비디오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마이바흐 쯤 타고 다니는 아가씨가 (매우 익숙한 = 자주 놀러가나보다) 게토에 놀러가 덩실덩실 춤을 춘다 뭐 이 정도다. 하지만 벼락부자가 된 미국 힙합의 일부 M/V와는 다르게 여기에 나오는 게토는 물론 이 아가씨나 지디의 홈타운이 아니다. 말하자면 안전하게 재현된 세계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저변에 깔린 안락함은 맨 위에서 말한 서브컬쳐가 재현되는 하이엔드 패션신도 마찬가지다. 티셔츠의 로트와일러는 화를 내고 있고, 빌헬름의 쇼에서는 시위를 하고 있고, 때때로 거친 스트리트가 재현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티셔츠 프린트와 사진 위, 그리고 캣워크 위에서의 일일 뿐이다. 이 역시 그래야만 한다. 좀 더 리얼한 분위기가 넘치면 그건 그것대로 흥겨울 뿐이다.

한때 이 곱게 자란게 분명한 와이지의 엔터테이너들이 대체 어디에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나 항상 궁금했었다. 곰곰이 따져 보면 그런 것들을 날 버린 놈, 못생긴 나, 더 잘 나가는 년 뭐 이런 것들이었는데 내용은 기억 어딘가로 파묻혔고 화냄의 인상만 여전히 강렬히 남는다. 예쁘게, 멋지게 화 내는 법. 시위를 나가 맥도날드를 때려 부수면서도 사진에 찍힐 각도를 생각하는 법(이건 이번 시즌 카발리가 잘 보여줬다, 이석기가 저스트 카발리를 입었다면 어땠을까).

http://t.co/3sJdEFl412
 
마침 씨엘과 텐아시아의 인터뷰에서 그 질문이 들어있는데 물론 명확한 답은 없다. 그 대상이 존재하면 안된다. 대상없는 분노가 어설프게 진정성을 가지면 호밀밭이나 책상 위에 올라서 카르페 디엠! 따위의 엄한 곳 말고 갈 곳이 없다. 그런 것보다는 사실 백번 낫다. 

지방시의 상어 티셔츠를 입었다고 서핑을 가야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아니 정말 서핑을 가면 곤란한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저 위의 첨단 패션과 태도도 결과도 함께 가고 있다. 사실 와이지 쪽은 아이덴터티의 일관성이 하나의 디자이너 하우스만큼 중요하진 않기 때문에 여러 브랜드의 융합이 가능하고, 이에 시각적 압축률이 훨씬 높다는 점에서 보다 진일보한 면도 있다.

다만 와이지의 명성이 아직은 패션 디자인의 하이엔드 마켓을 리드할 형편이 아직 못되고, 그들은 엄연히 옷을 만드는 곳이 아니고 음악인들을 데려다 해석하고 적용하는 곳이라 하이엔드 패션의 세계 안에서 파워의 면에서는 밀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옷 가지고 이 정도 덴서티를 보여주는 디자이너 하우스는 아직 못 봤다.

썰전을 보다보면 다른 예능 방송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처럼 이런 모습이 재밌있든 말든 이미 본 이상 이제는 뭘 봐도 부족하고 비어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런 결과가 딱히 나쁘다거나 웃기다거나 한심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바닥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는 와이지의 M/V로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사항과 결론은 지면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물론 지면이 없을 거 같으니(ㅜㅜ) 좀 더 덧붙이자면 이런 이유로 씨엘의 솔로는 전형적인 선을 걷고 있으나 아쉽게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맥도날드같은 대중 프랜차이즈에서 좀 더 고급 분위기의 빕스 버거로 넘어가느냐 같은 기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이상하게 잘 넘질 못한다. 쎈 연기를 하고 있지만 사람이 쎄질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

그건 맨 위의 로트와일러도 마찬가지다. 이왕 이럴 거면 좀 더 판을 크게 넓게 보고 대책없이 뒤집어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것도 시키면 또 잘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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