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즐거움2013. 10. 26. 01:17
가지고 있는 옷들 중 이상한 옷들이 있다. 아쉽게도 이상해서 좋은 건 아니고 그냥 이상하다. 3만 2천 킬로미터 퍼 아워인가로 나는 위성 잔해의 속도처럼 급변하는 계절에 옷장을 정리하다가 눈에 띄길래 주욱 떠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가게를 파먹다가 지겨워지면 뉴스를 판다. 뉴스를 파먹다 지겨워지면 여기저기 들렀다가 결국 제 몸을 파먹는 법이다. 01이라는 숫자는 시리즈로 나가려는 의지의 표시인데 물론이지만 잘 모르겠다.

잠시 생각해보니 가지고 있는 책과 음반에 대한 미련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는데 가지고 있는 옷에는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한다.

 
이 옷은 굉장히 오래된 옷이다. 가죽이다. 소가 고비사막에서 죽고 20년 쯤 지나면 비슷한 상태의 가죽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종이 같지만 아직 찢어지진 않는다. 사실 찢어질 지도 모르는데 안 해봤다. 상표는 뭐래는 지 읽을 수가 없고, 사이즈로 예상되는 자리에는 LLLL이라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있다. 그리고 Styled in BOSTON이라고도 적혀있다. 디자인드 바이 애플 인 캘리포니아, 어셈블드 인 차이나 같은 현대어의 옛스런 버전이다.

목에 붙어있는 털은 뗄 수 있다. 손목과 허리에는 시보리가 있는데 굉장히 두껍다. 이 두꺼운 게 뭐라고 해야 하나... 군용품, 게중에서도 2차 대전이 막 끝났을 때 쯤 사병이 입다가 폐기 처분한 옷감의 느낌이다. 기능적으로 보자면 무거움 때문에 추위를 잊게 만든다. 하지만 사실 꽤 길어서 바람은 잘 막는다. 자켓 안은 융이 덮여있다. 요즘 스타일이 아니라 털이 약간 길다. 이 융도 그렇고 목털도 그렇고 예를 들자면 애완견 목욕을 시켰는데 영원히 마르지는 않는 그런 걸 떠올려보면 된다. 어딘가 꺼림칙한 촉촉함이 상존한다.

내가 입기에 이 옷은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옷이 어깨가 넓고, 길이가 짧다. 그러면서 품은 애매해 사실 숨이 좀 막힌다. 그리고 주머니가 얕아서 손이 다 안들어간다. 하지만 무겁긴 해도 꼴에 가죽이라고 방풍에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 저래가지고 바람이 들어오면 엄한 죄 값을 치뤄야 한다. 어깨가 넓은 건 목에 달린 털 때문에 그렇게 까지 이상하진 않고(안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주머니는 포기하고 장갑을 끼면 된다.

이 옷을 일 년에 한 번 정도 입는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안 꺼내 입는 건 버리자라는 마음을 먹은 이후부터 그러고 있다. 버릴 생각은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딱히 아깝지도 않고, 애정도 없는데 보고 있으면 웃긴다. 입고 있으면 더 웃긴다. 사실 옷이 날 이제 좀 묻어줘라고 애원하는 거 같긴 한데 웃기기 때문에 계속 붙잡고 있는 거 같다.

약간 미안하지만 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애꿎은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거다.



Posted by macro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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