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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Fashion Fades

by macrostar 201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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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사라진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역시 사라지는 거 같다. 스타일은 영원하다고들 하는데 그것도 모를 일이다. 포아레가 구조해 낸 스타일은 지금 와서는 번잡스럽고 필요없이 화려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그의 스타일 자체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패션 쪽에서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양식들 - 호블이나 램프쉐이드 같은 - 은 남아있다. 그러고보면 그나마 오랜 수명을 지닌 건 양식이 아닌가 싶다.

여튼 지난 2년 간 티시의 지방시는 허황된 패션, 스놉한 패션의 상징처럼 되어갔는데 계속 지방시 남성복 라인을 웃기다고 바라보면서도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건 아마 한때 고딕을 했던 의욕 충만한 신인 디자이너의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편견이지만, 고스들은 순진하고 순수해라는 인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새 그림이나 그려놓고 파는 백만원짜리 티셔츠라는 건 패션이 어쩌구 저쩌구 해봐야 기본적으로 웃길 수 밖에 없다. 물론 놀리기 좋은 것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에 반비례해 거대한 히트 상품이 된다. 연예인들의 옷을 비롯해 서태지의 구찌와 신창원의 미소니(이건 가짜였다고 밝혀졌지만)를 기억해봐도 알겠지만 이슈가 되는 것들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시장을 점령한다. 덕분에 우리는 요즘 버라이어티에 나온 박진영과 2am의 사진들, 빅뱅의 뮤직 비디오에서 무수한 지방시 제품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지점이 어디부터였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사실 톰 포드에 대해 썼던 이야기(링크)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꽤 간단하다. 하지만 그와는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그런 이야기다.


2005년 FW의 Riccardo Tisci 컬렉션. 밀란에서 했고, 모델들은 마리아칼라 보스코노(사진) 말고는 대부분 티시의 친구들이었다. 다들 첫번째 컬렉션의 모델들은 친구들이다. 뒤에 십자가가 놓여있고, 아주 음산한 꽤 재미있는 패션쇼였다. 위 사진은 스타일 닷컴(링크)에서.

이 블로그에서 처음 티시를 '주목'한다고 썼던게 작년 즈음이다. 2005년에 컬렉션 한 번 하고 벼락 스타처럼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을 때만 해도 세인트 마틴 출신 중에 하도 그런 사람이 많았던 때라 또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었다. 다만 고딕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라더라는 것 정도가 특이했다. 거기에 그의 첫번째 컬렉션은 순진할 정도로 내러티브가 강한, 거의 스토리 따라 일대 일로 매칭된 컬렉션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거 한 방에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또 2008년인가 09년인가에 매장에서 구경한 그의 여성복은 꽤 놀라웠다. 엄격하고 단정하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훌륭한 고급 옷들이 으례 내뿜는 아우라를 보여주고 있었다. 티시에 대한 인상은 그게 가장 크다. 그러다가 2010년에 들어와서 티시의 지방시는 디테일이 갑자기 풍부해졌고, 이미지가 매우 선명해졌다. 그걸 보고 지방시에 주목한다는 이야기를 쓰면서 티시가 조만간 임계점에 도달할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래 링크.

http://fashionboop.com/169 

임계점이라는 말은 사실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단어의 실제 의미와 다를 수도 있다)라 설명을 좀 보태자면, 어떤 사람이 디자인이든 사업이든 음악이든 막 하다보면 어떤 정점을 찍어대거나 허물을 벗듯 갑자기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아니, 이 사람이 원래 이랬나.. 하는 기분. 날 때부터 천재도 있다 하는데 그런 경우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낌새만 있었는데 역시 대단해졌다거나, 역시 망했다거나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걸 꽤 재미있어 한다.

2010년 들어 지방시의 변화는 매우 선명했고, 그러므로 뭔가 방식을 깨달은 거고 그러니 조만간 어떤 방점을 찍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착각했던게 있다. 티시니까, 지방시니까 여성복과 그의 고딕풍 음울함을 읽어냄에 취해버린 바람에 그의 남성복 라인을 그저 해프닝스러운, 웃기는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해 버리고 있었다. 시커먼 배경에, 건방져 보이는 아저씨들이 거대한 개 그림에 양가죽 자켓 같은 걸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그건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http://fashionboop.com/74 

하지만 그의 방향 전환은 남성복 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톰 포드의 '업적'(?)이라면 고급 브랜드를 좀 더 휘발성으로 만들고, 그나마 있는 영속성의 불씨를 완벽히 잠재우고, 거의 모든 하이 엔드 브랜드를 고급화라는 이름으로 평면화시킨 거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덕분에 패션은 심하게 재미가 없어졌는데 티시는 거기에 결정타를 얹었지만 명민하게도 그렇게까지 티나는 짓을 하진 않았다. 그는 어떤 식으로 시장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올 시즌 수많은 패션쇼에 널린 화려한 빅 프린트들이 증명하듯 마켓 리더가 되었다.

우선 빅 로고를 빅 프린트로 치환시킴으로 좀 더 은밀한, 하지만 난도는 좀 낮은 시그널링이 가능해졌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새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고, 아는  사람에게는 지방시의 티셔츠다. 이건 커다랗게 Dior라고 적힌 글씨로 뒤덮혀있어 저 가방이 생전 처음 본 거라 해도 아, 저게 디오르인가 보구나 하던 상황과는 약간 다르다. 사실 글자가 써진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우선은 그런 민망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나마 조금 더 예쁘다. 

더구나 디자이너 하우스 제품들의 가격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고, 구매자들은 더한 가격도 충분히 서포트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시그널링을 범 대중적으로 뿌릴 필요가 없다. 한때 좀 더 기민하게 서로를 알아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건 또 이 시대에 요구하기엔 너무나 번거롭다. 코드 공유로도 충분하고 티시는 그 지점을 파고 들었다.

또 하나는 패션을 더욱 휘발성으로 만들었다. 쉬아파렐리의 바다 가재 드레스와 다르게 아무튼 프린트 셔츠들은 양산되는 타입이고(사실 양산하진 않았고, 그래서 더욱 고 가격대를 고수할 수 있었지만) 그러므로 강한 인상에 비해 두 시즌만 지나도 옛날 옷 느낌이 강해진다. 하이 엔드 제품이 이런 식으로 유행을 만들면 매우 곤란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심지어 SPA 브랜드들마저 그걸 따라하고 있다. 이런 건 뷔통의 PVC나 샤넬의 격자 무늬같은 스테디와는 분명 다르다.

너무 유행하는 걸 입으면 창피하지 않냐는 이야기를 모 패션 에디터와 나눈 적이 있는데 요새는 그런 면에 스스럼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전에도 그런 면이 없던 건 아니지만 요즘은 확실히 그런 경향이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티시도 2010년까지는 트렌드세터들을 상대하는 정확한 방법을 몰랐었을 거 같지만 지금의 티시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걸 보다 확고하게 만들어내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이것은 사실 아디다스나 나이키의 리미티드와 거의 비슷한 방식이다. 줄을 세우는 방법을 아는 건 훌륭한 미덕이다. LVMH의 선구안은 이런 점에서 확실히 빛이 난다. 이런 캐주얼 적인 면 덕분에 스트리트의 트렌드세터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Refinery29(링크)에 의하면 그는 자기의 옷을 다크, 고딕 이라고 부르는 걸 매우 싫어한다. 대신 Romantic이라 불러달라고. 이런 이야기를 본인이 직접 한다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여튼 고스라니까 가지고 있던 짠한 느낌 따위는 철회해도 될 듯. 우왕 이게 만 불이래 ㅋㅋ 하면서 놀리는 것도 슬슬 한심하고.

한동안 톰 포드 따라하기에 열중했던 패션계는 또 한 동안 티시 따라하기에 열중하게 될 거다. 개인적으로는 톰 포드 때는 화가 났는데 티시 때는 이게 원래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이 블로그는 결국 예쁘고 멋진 사진에 붙여 뉴스 전달이나 하는게 세상 회전에 조금이라도 맞는 건지. 앞으로 '하우스'라는 이름에 그나마 납득이라도 할 수 있는 게 과연 몇이나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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