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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생애 주기, 칼하트 J02의 예

by macrostar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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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대체적으로 3단계의 생애를 거친다. 처음에 빳빳한 새거, 낡아가는 과정, 완전히 낡음. 보통은 낡아가는 과정에서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어딘가 다른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이 단계는 아주 지리하기 때문에 대부분 중도 탈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거나 되는 것도 아니다. 완전 낡음을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은 거기까지 갈 수 있는 옷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불필요하게 섬세하거나 관리가 어렵거나 하는 옷들은 안된다. 아무튼 무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소재로 만든 예전 작업복 류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아웃도어 류라고 해도 등산이나 낚시용으로 나온 기능성 직물을 사용한 요즘 옷은 좀 어렵다.

그리고 많이 입는 옷이어야 한다. 안 입으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완전 낡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칼하트 영상 중에 초반 빳빳함을 없애기 위해 밟고 던지고 내려치고 뭐 이런 영상이 있는데 이러자고 하는게 아니다. 물론 칼하트 워크웨어 류는 입기 전에 3번 정도는 세탁기에 돌려야 그나마 입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리고 또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직업상 형편없게 된 옷을 계속 입어도 되야하고, 또 주변인들도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 날씨도 중요하다. 습한 곳인지 건조한 곳인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옷은 물론이고 자동차부터 집, 지우개나 볼펜, 볼트와 너트까지 무엇이든 처음의 멋짐이 있다. 특히 공산품의 경우 그 멋짐이 두드러진다. 인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특유의 광택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가만 두고 감상할 게 아니라면 이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의 멋짐에 적당한 반발심을 가지는 게 좋다.

예전에 스마X스마를 종종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제인 버킨이 나와서 요리를 한 기무라 타구야와 쿠사나기 츠요시에게 버킨 백을 선물로 주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무튼 귀한 가방 뭐 그러니까 막 쓰라고 만든 거라면서 사인도 하고 막 늘리고 밟아서 주는 걸 보면서 세상은 저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위 사진은 제인 버킨에게 밟히고 있는 새 버킨백.

 


중고로 구입하면 첫 단계는 못보는 경우가 많다. 첫 단계를 지나고 나면 위 사진처럼 생활의 냄새가 뭍어난 상태가 계속 된다. 어디가 조금 더 낡아도 눈에 띄지 않고, 생채기가 나거나 해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첫 단계와 위 사진에 보이는 적당히 낡은 모습 사이에 이미 대부분의 도심 속 현대인들은 폐기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기간 동안 버텨야 하는 부분들이 또 있다. 예로 든 옷 칼하트 J02 아크틱 트래디셔널의 경우 문제가 될 만한 곳은 덕 코튼의 끝자락(손목 끝, 허리 아래)이 해진다든가, 지퍼가 고장난다든가, 숨겨져 있는 손목 시보리의 올이 풀린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옷이 해지는 건 그려려니 할 수 있지만 지퍼가 고장난 건 상당한 위기다. 고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통으로 갈아야 할 필요도 있다. 그 비용이 옷 가격보다 더 나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 원래의 부품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맨 위 조건에서 본사의 AS가 가능한 브랜드라는 걸 추가하는 게 좋다. 또한 망하지 않을 브랜드라는 점도 추가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도 안될 수가 있다. 갑자기 한국에서 철수를 할 수도 있고, 영원할 거 같던 브랜드가 망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옷을 '끝'까지 입는 건 노력 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운이 따라야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단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에 운명의 옷을 만나도 끝까지 못 가는 경우가 있고, 또 운명도 아닌데 끝까지 붙잡으려 하다가 탈락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건 통제 가능한 범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런 모든 걸 감수해도 이 중간 단계는 세월이 흘러 드러나는 옷의 새로운 면모를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지리하지만 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이다. 애매하고 지루한 상태가 끝없이 계속된다. 위의 옷 같은 걸 도심의 일상복으로 사용한다면 더욱 그렇다. 환골탈태가 이뤄질 지 확신할 수도 없고, 다 때려치우고 다른 거 입고 싶고, 지긋지긋하고, 낡음의 변화 관찰도 할 만큼 해서 더 볼 것도 없다. 다음 변화는 5년 뒤, 10년 뒤에나 체크해야 눈에 어슴프레 보이기라도 할 거다. 이 단계를 넘기기가 아주 어렵다. 데님은 이 단계가 그나마 빠르고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인기가 많다.

그 단계를 지나고 나면 아마도 이런 게 된다. 검색에서 다른 사진들도 좀 나왔는데 칼하트 덕 자켓 류는 땀에 절어있는 게 너무 많아서 모니터를 뚫고 냄새가 나는 거 같다. 그래서 바싹 마른 거 같은 위 사진을 골랐다. 하얗게 된 건 세탁 때문이라기 보다 아마 태양빛 때문일 거다. 자외선은 모든 색을 날려버린다. 참고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 정도 상태의 중고 옷 구매는 관두는 게 낫다. 개입할 수 있는 범위가 적어도 반 이상은 있어야 한다.

아무튼 이 정도가 되었다면 이걸 입은 인간도 신령이 되고 옷도 신령이 되었을 거다.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다. 심지어 옷도 기뻐하지 않을 거 같은 게 너무 지쳐 보인다. 입고 다니면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화를 내고,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떨어져서 걷는다. 칼하트에서는 저 징그러운 놈 하면서 옷을 저 정도로 입지는 못하게 할 방법을 좀 더 연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옷을 입는자와 옷은 대체 어떤 시절을 거쳐 지나왔는지 안다. 그거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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