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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시몬 로샤의 남성복, 2023 SS

by macrostar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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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이 성별 역할 분리 같은 구세대의 가치관을 전달하고, 강화하고, 내면화시키는 원인을 남성복과 여성복의 엄격한 분리에서 찾을 경우 그 해결 방안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거다. 하나는 남성복을 여성이 입는 것. 예를 들어 슈프림이나 아이앱스튜디오, 아크로님 같은 브랜드가 해당될 거고 아웃도어나 워크웨어, 밀리터리 등 기능적 의류에 기반한다. 또 하나는 여성복을 남성이 입는 것.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나 이번에 니나 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해리스 리드, 자크무스 등이 있을 텐데 보통은 기존 고급 패션의 의류에 기반한다. 이런 걸 합쳐서 젠더리스 패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중 앞의 것은 아직 포멀한 영역과 비즈니스의 영역 같은 데를 포섭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영역을 워크 자켓 같은 게 활약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이에 관련된 책을 쓰고 있지만 아직 한참 있다 나올 예정이니 나중에라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뒤의 것의 경우 패션이 담고 있던 비실용적 영역이 지나치게 극대화되어 있고, 2022년에 남성에게 치마를 입히는 게 우스꽝스러움 말고 뭔가 만들어 낼 수는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의문이 있다. 아무튼 후자의 접근 방식을 두고 두고 "OOO이 남성복에 아름다움을 넣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가끔 보이는 데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구세대적 기준을 너무 드러내고 있다. 관용구라 해도 그 안에는 말한 이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시몬 로샤가 처음으로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미 H&M과의 콜라보에서 남성복 라인을 선보여서 다들 이런 흐름이 있구만 했겠지만 본격적 데뷔다.


기존 여성복의 양식들을 남성복에 많이 집어 넣었지만 그렇다고 남녀 통합 패션쇼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듯 하고 그냥 차례대로 함께 나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위 사진은 하이프비스트(링크)에서. 풀 컬렉션을 볼 수 있다.

남성복, 여성복 모두를 해체한 다음 새로 구성 조합해 새로운 길을 마련하기 전까지 위 둘은 반복 재생되며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새로운 길이 지금 말한 두 가지 방향 중에서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는 한데 그런 걸 끌고 갈 새로운 디자이너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패션 산업의 측면에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어할까 생각해 봤을 때 단연 후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복잡하고 비싸게 만든 옷을 더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찌의 매출이 펑 뛰었던 이유는 이런 테일러드 옷 때문이 아니었다. 티셔츠 만들어 거기에 뭐라도 의미와 맥락을 부여할 수 있다면 훨씬 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옷에 비싼 가방과 액세서리를 들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요새 핸드백 시장이 매우 강화되고 있을 텐데 남성에게 핸드백을 들게 할 방법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환경 규제 등에 의해 복잡하고 밀도감 높은 옷을 만드는 건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그럼에도 결과물은 더 별로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또 진짜 패션 운운하며 빈티지 매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겠지만 그런 게 패션의 재미기도 하다.

이렇게 말을 하면 이번 시몬 로샤의 남성복 컬렉션은 약간 절망적이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히 재미있다. 그리고 아직은 과도기인 상태고 여러 실험이 모두 의미가 있는 때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인데 어떤 이유가 중요해져 인류가 치장에 더욱 목숨을 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무엇인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면 지금 어색하게 생각되는 옷도 아무렇지 않아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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