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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칸예 웨스트, 슬로우 패션

by macrostar 202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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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사실 딱히 밀접한 관계는 없을 지도 모르는데 얼마 전 칸예의 돈다 프로모션을 보고, 또 어떤 계기로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 김에 여기에도 올려본다. 원래 제목은 과연 슬로우 패션의 시대가 올까. 올렸던 곳은 여기(링크).

 

 

하이프, 어글리 프리티, 부랑자 룩, 스트리트 패션 등은 기존 하이 패션의 대척점을 형성하는 비주류 패션이었다. 이것이 패션이 주류의 자리로 넘어와 자리를 차지하게 된 지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동안 힙합,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드, 서핑, 스니커즈 문화 등이 함께 섞여 1980년대 이전부터 쌓여왔지만 2010년이 지나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로도 10여년 가까이가 지났다.

 

이렇게 기존의 패션 미감에 일부러 트집을 잡는 듯한 반항적 패션은 모두 일종의 안정을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일종’이라고 말한 이유는 개인은 위태로울 수 있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기반 시스템은 단단하고 안전해 보인다는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하다. 지하철, 도로, 건물 등 정교한 구조물들은 어지간히 큰 태풍 같은 것이 와도 대도시 속에서는 그저 비와 바람이 심한 날 정도로 생각하며 지나가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풍요가 만들어 낸 사회 안전망, 복지 등의 기반 시설 위에 놓여 있음에도 젊은 세대인 십대, 이십대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전후 세대가 경험한 성장률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단단하게 고정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조금만 생기면 주식, ETI, 비트 코인, P2P 투자 등 낯선 고위험 금융의 세계에 뛰어드는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다.

 

스트리트 패션이 주류 패션 시장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에 비트 코인에 투자했던 십대, 이십대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과장이 있을지 몰라도 마냥 소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손해를 봤다는 사람이 잔뜩 있다지만 누군가는 큰 돈을 벌었다. 그리고 비싼 옷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바로 그런 소수를 위한 옷이다.

 

이와 같은 사회 안정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만 부랑자의 옷이 패션이 될 수 있다. 진짜 부랑자가 부랑자의 옷을 입는 것은 냉혹한 현실일 뿐이다. 그렇지만 비비안 웨스트우드나 카니예 웨스트가 부랑자나 유목민 풍의 패션을 테마로 옷을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런 패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일부러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비싼 패션은 자리를 잡을 수 없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런 새로운 패션 감각은 고급 패션과 정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패스트 패션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빠르고 인스턴트 같은 패션 소비 방식은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면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어서 거기에 뭔가 있는 것이 아닐까 믿어 왔던 패션이라는 문화를 진정 소모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패션은 보다 본격적으로 과거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지금 티셔츠나 스니커즈를 사려는 사람에게 있어 힘들었고 소수였던 시절의 어려움과 이유는 망각된 채 즐거웠던 기억만 새롭게 포장되어 미화되고 있다. 구찌와 함께 70, 80년대의 조악한 모조품을 복각하고 협업 라인을 론칭한 힙합 패션의 전설 대퍼 댄은 1980년대에 뉴욕에서 부티크를 운영하던 사람이다. 뎀나 즈바살리아가 발렌시아가에 안착하는 기반이 된 포스트 소비에트는 1990년대 이야기고 러시아에서 버버리를 입던 교외의 반항아들인 차브는 2000년대의 이야기다. 얼마 전 슈프림은 영국 그룹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러블리스(loveless) 앨범과 협업으로 팝업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러블리스는 1991년에 나온 앨범이다.

 

물론 지금의 현실이 있게 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는 방식이 새로운 세대들이 현재를 기념하고 소비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시대의 선두에서 이미지를 끌고 가는 패션이 과거를 지향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신호는 아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는 경우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이프 문화와 패스트 패션은 패션의 주기를 훨씬 빠르게 만들었고 트렌드에 정착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새로운 이미지를 밀어 붙였다. 이런 속도는 집착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극적인 순간을 향해 그칠 기미도 없이 나아가는 도중에 갑자기 암초를 만났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패션 시스템 특성상 생산부터 운송, 판매까지 전반적으로 마비가 되면 끊임없이 이미지를 쌓아야 하는 지금의 패션은 특유의 폭발적인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뒤돌아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 세계가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발전된 곳이라고 믿었던 나라에서 수많은 시신이 제대로 처리되지도 못하고 있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이런 경우 가게 될 길은 크게 봤을 때 두 가지다. 보다 극단적이 되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상을 마지막까지 즐겨보자는 사람들과 혹시나 방법이 있다면 파멸의 속도를 늦춰보고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양쪽 진영 모두 서로의 기대가 있다. 오프라인 매장들이 문을 닫았지만 온라인의 스니커즈 재판매 사이트들은 여전히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 오프 화이트의 마스크가 리셀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알 수 있듯 이 웃고 즐기는 거리의 문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반면에 깊은 회의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는 자연을 파괴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뭐든지 빠르게 소비하고 소모하는 방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니 하이프와 속도에 중독된 패션을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 제품의 질을 중시하고 아끼고 오래 입는 방식을 지향한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패션과도 연결된다.

 

앞으로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고 혹은 백신이 나오고 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패션의 흐름이 한 번 끊겼다는 점이다. 흥분과 몰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패션 트렌드는 이전의 기분을 다시 느끼기며 분위기를 되살리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 사태는 전 세계에 걸쳐 영향을 미치며 위기의식을 갖게 했고 보통 이럴 때 인식이 리뉴얼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전쟁처럼 모든 기반을 파괴해 버린 것은 아니고 세상은 그대로 있다.

 

패션 위크나 오프라인 매장 등 존재 의미가 희미해지고 있던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슬로우 패션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꽤 괜찮은 길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인류는 검소함이나 절제, 자연으로의 복귀 같은 것을 선택해 온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작년 말의 코로나 이전 시점으로 그대로 복귀할 거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과연 코로나 시대를 거친 패션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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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예 웨스트가 메르세데스 벤츠 스타디움 공연 이후 LA의 쇼핑몰에서 목격된 사진을 봤는데

 

 

패션은 결국 코스프레고 역할극이자 상황극을 하는 거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동화해 주면 그 연극은 더 잘 플레이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할 연기의 집중이 필요하다. 이런 지속성은 패션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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