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1 14:10

이런 이야기 자주 하긴 했는데 슈프림 뉴욕의 2019 SS 아이템 발표(링크)를 본 김에 간단히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이번 슈프림의 액세서리 라인에도 물총, 당구 큣대, 반창고 등 소위 "이상한" 것들이 잔뜩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일상의 평범한 용품들로 평번한 사람들에게도 아주 익숙하고 그걸 슈프림이 재조명해 다른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번 시즌의 슈프림 밴드 에이드. 반창고 모양도 스케이드 보드 형태로 한 걸 보면 제작 비용은 나름 들었을 것 같다. 장인이 매번 조금씩 다른 걸 만드는 것도 비용의 문제가 생기지만 평범한 공산품 라인에서 다른 형태를 뽑아내는 것도 역시 비용의 문제가 생긴다. 아무튼 이 정도 하고 있으면 슈프림의 이런 전략은 예외적 유머라기 보다 정체성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딱 보면 예컨대 플래그십 스토어에 그들만의 리그로 박제되어 있는 하이 패션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 생활과 큰 괴리가 있는 데 이걸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의 소품들을 패션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패셔너블함이라는 위치로 끌어 올리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대 아트의 립오프 같은 거라 할 수 있을 텐데 소매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약간 다른 맥락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청바지 레플리카(링크)도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평범하고 흔해서 쉽게 지나치는 청바지를 탐구해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발굴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시킨 다음 구형 기계 메이드, 구형 재봉틀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즉 이렇게 평범한 청바지는 "제작 기법"이라는 패션의 시스템을 통해 다른 생명을 얻게 된다.


이런 방식도 여전히 존재하지만(예를 들어 하버색이나 카피탈, 엔지니어드 가먼츠 처럼) 하이 패션의 경우 사용하는 패션의 시스템은 아무래도 "로고"다. 그냥 클립과 오프 화이트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클립은 분명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건 물론 소비자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근데 사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예컨대 지금 하이 패션을 이끄는 브랜드들을 보면 그 오랜 역사의 맨 앞에는 마구를 만들고, 귀족의 여행용 가방을 만들고, 헌팅 웨어나 장신구를 만드는 시절이 나온다. 즉 귀족의 소소한 일상 용품을 만들던 브랜드들이 전후 부상한 신흥 중산층을 위한 유럽풍 + 현대풍 하이 패션이라는 시스템을 완성한 거기도 하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귀족을 위한 옷을 만들던 장인들은 거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라졌다. 에르메스의 가죽 포스트잇 케이스, 티파니의 실버 요요, 프라다의 금속 자 같은 게 있긴 하지만 이게 어떤 맥락 아래 놓여있냐는 차이가 있다. 



사실 이런 분야의 초창기 개척자들로 평범한 티셔츠와 서핑 보드에 서명을 그려 넣은 스투시, 위의 슈프림을 비롯해 후지와라 히로시 그리고 베이프와 준 타카하시 같은 사람이 있을 거다. 또 나이키나 아디다스처럼 로고에 힘이 있다는 걸 만들어 낸 브랜드들도 앞에 있을 거다. 슈프림과 후지와라 히로시만 해도 80년대 말, 90년대 초니까 벌써 이십 몇 년을 서서히 가격을 올려왔고 드디어 스트리트 패션의 융성과 함께 타이밍을 캐치하고 버질 아블로처럼 기민한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이 방식 그대로 하이 패션 진입에 성공했다.




하이 패션과는 조금 다른 형태지만 후지와라 히로시가 최근 몇 년 시도하고 있는 파킹 긴자, 콘비니 긴자 같은 것 역시 이런 식으로 일상을 재조명한다. 




그런 점에서 버질 아블로가 칼 라거펠트의 사망을 추모하며 올린 이 사진은 역시 뭐랄까.. 돌려 말하는 게 없다.




Posted by macro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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