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티클

좋은 옷은 어쨌든 좋은 옷이다

by macrostar 2017. 8. 7.
반응형

꽤 옛날 일인데 질 샌더 티셔츠를 아주 오랫동안 입은 적이 있다. 그냥 심플한 블랙 티셔츠였지만 나로서는 당시까진 듣도 보도 못한 질감에 역시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까만 색이었다. 뭔가 이상한 재단이 들어가 있어서 반듯하게 접히지도 않았고 그 덕분인지 이상하게 몸에 잘 들어 맞았다. 



물론 12번 세탁하면 낡은 티셔츠가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천천히 낡아갔는데 처음의 모습 중 가장 중요한 부분 - 예컨대 쉐이프와 컬러 - 이 거의 완벽하게 유지된 상태로 몇 년을 용하게 버티다가 어느 타이밍이 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지는 식으로 생명을 다했다. 물론 티셔츠 치고는 비쌌지만 그렇다고 요즘처럼 아주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소재부터 착용감, 수명까지 모든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UT가 있다. 유니클로에서는 이외에도 드라이핏, 슈피마 등등 다영한 티셔츠들이 나온다.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엔 19900원짜리가 있고 12900원짜리가 있는 거 같다. 하지만 9900원은 심심찮게 볼 수 있고 가끔 5000원, 아주 가끔은 3000원에 매대에 놓여 있다. 뭐 굳이 피해야 할 것만 피할 뿐이고 프린트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정말 만만하고 꽤 훌륭한 티셔츠다. 



상당히 얇은데 미국식 티셔츠의 얇음하고는 약간 경향이 다르다. 일단 얇은 덕분에 착용감도 좋은 편이다. 생긴 거 자체가 너무나 베이직해서 티셔츠의 모습으로 멋을 부리겠다면 좀 곤란할 지 몰라도 프린트 측면에서는 정말 쉼 없이 신제품들이 나오기 때문에(뭔가 다 비슷비슷하긴 하지만) 가끔 아주 마음에 드는 것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문제가 있긴 한데 구멍이 잘 나는 편이고 오랜 세탁을 거치면 상당히 쪼그라든다. 예전에는 방향을 어떻게 잡았는지 길이가 심하게 줄어들었는데 요새는 그냥 전반적으로 작아지는 느낌이다. 그래봐야 요 몇 년 간은 매번 5000원 짜리만 사고 있기 때문에 알게 뭐냐는 마인드로 사용하고 있다. 입고 나가는 것도 잠옷도 일요일 낮에 집에서 컴퓨터 두드리거나 강아지랑 놀면서 입고 있는 것도 어느덧 거의 유니클로 티셔츠다.



그런가 하면 이 네이비 블루라는 회사에서 나온 건즈라는 브랜드의 티셔츠가 있다. 경년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헤비 온스 티셔츠를 한 번 입어보자 싶었지만 대부분 가격이 비싼 편이라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라쿠텐을 뒤적거리다가 건즈라는 회사의 티셔츠를 1천엔 정도에 할인해서 팔길래 2장을 구입했었다. 일본에서 Vanson 티셔츠도 만들고 그러나 본데 자체 상표인 거 같다. 전반적으로 바이커의 냄새가 풍기는 회사다.



여튼 홈페이지에 보면 테네시 산 면으로 울퉁불퉁한 표면을 구현했고 어쩌고 저쩌고 적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상당히 복잡한데 테네시산 코튼을 가지고 와카야마에서 원단을 만들고 시네마 현의 봉제 공장에서 바느질을 하고 역시 간사이 지역의 프린트 공장에서 프린트를 한 다음 오사카 염색 공장에서 세척을 하고 건조를 한다나 뭐 그렇다. 이런 류의 옷들이 보통 그렇듯 뭐 배경 설명이 길다. 



그렇지만 딱히 별 특징도 없는 게 사실이고 브랜드 밸류도 거의 없고(gunz가 뭐냐...) 기본적인 프린트 디자인이 구질구질 일색이라 잘 안 팔리는 지 할인 행사를 많이 한다. 전반적으로 산뜻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요새도 신제품이 나오고는 있다(링크). 




쇼핑몰에 올라와 있는 사진마저 조악하다. 라쿠텐의 상표 소개 사진.



이 티셔츠는 질 샌더와는 또 다른 모습의 신세계를 보여줬다. 티셔츠 치고는 말도 안되게 두껍고 무겁고 튼튼하고 부드럽다. 착용감도 굉장히 좋지만 무엇보다 두터운 덕분에 온 몸이 보호 받는 느낌을 준다. 목에 리브도 뭐하러 이렇게 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뭔가 과하게 열심히 만든 것이다. 여튼 만져볼 때마다 감촉도 정말 좋고 전체에 걸쳐서 뭐하러 이렇게 까지...라는 생각이 드는 오버 스펙의 티셔츠다. 



혹시 아무런 프린트가 없고 단색에 포켓만 하나쯤 붙어 있는 같은 티셔츠를 1천엔 대에 팔면 그냥 이것만 줄창 입는 삶도 괜찮을 거 같긴 한데(포켓 버전은 이번 시즌엔 없는 거 같고 그냥 단색은 세금 포함해 3456엔이다 - 링크) 아무래도 그전에 망하거나 브랜드 접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이 모든 티셔츠들은 브랜드들이 추구하는 방향도 다르고 그 결과도 다르고 가격도 다르다. 만듦새도 다르고 특징도 다르고 낡아가는 방식도 다르고 사용자 경험도 상당히 다르다. 티셔츠만 가지고도 세상은 정말 다양하구나 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른 옷과 패션으로 범위를 넓힌다고 이 경향이 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중에 뭐가 우위냐 그러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건즈는 건즈의 특징이 있고 질 샌더는 질 샌더의 특징이 있다. 만약에 질 샌더의 가격에 UT 같은 걸 팔면 문제일테고(그렇게 팔아서 브랜드가 남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회사의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또한 UT 가격에 질 샌더 같은 걸 팔아도 문제다(그렇게 팔 수 있다면 제조 과정 어딘가 착취가 있든지 뭔가 엄청 훔쳤든지 대부호의 자선 사업이다). 물론 그런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말 같지 않은 걸 말 같지 않은 가격에 파는 걸 볼 수 있다. 대부분은 디자인이라든가 다른 트렌드나 문화적 맥락 등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얀색 티셔츠가 한 장도 없다. 가을에 3팩 같은 거나 하나 사볼까 싶다. 월마트 헤인즈 티셔츠 제품 사진.




예전에 책을 쓰면서(링크) 하이 패션이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 멀어져 가고 있고, 그들이 그런 판을 만들고 있는 이상 평범한 이들도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있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트렌드에 놀아나는 비용이면 다른 재밌는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자신의 상황, 기호, 삶을 좀 더 자세히 쳐다보며 전반적인 취향을 만들어 가는 게 더 재밌지 않냐는 거였다. 이왕 수많은 옷을 입으며 살고 수많은 패션 트렌드를 보며 살고 있으므로 그냥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옷과 패션의 경향이 움직이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거나 옷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파악해 즐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재밌지 아니할까 하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시나 구찌, 발렌시아가의 티셔츠에 시큰둥한 태도를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든 저러든 그것들은 분명 좋은 옷이고 잘 만든 옷인 건 바뀌지 않는다. 



구찌의 티셔츠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유니클로 티셔츠의 조악한 만듦새나 재미없는 쉐이프를 비난할 이유도 없고 또한 UT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구찌 티셔츠의 허황된 세계관과 비싼 가격, 트렌드에 놀아나는 디자인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다. 그냥 가는 길이 다르고 서로 상관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 구찌를 입고 있다면 무슨 사정이 있을테니 그런 걸테고 누군가 UT를 입고 있다면 역시 무슨 사정이 있으니 그런 걸테다. 개인의 삶의 과정과 현 취향의 형성 과정을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타인에 대한 과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 결과인 현재의 모습에 대해 칭찬할 이유도 비난할 이유도 없다. 



물론 누군가 어느 날 문득 옷과 패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서 그때까지 입던 것과 뭔가 다른 걸 찾아보려고 하거나 다른 타입의 옷을 입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 놓고 있는 거겠지. 여하튼 다 각자의 소중하고 즐거운 삶이고 그러므로 서로 그렇구나 그것도 역시 괜찮네 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알아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