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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패션과 디자이너

by macrostar 201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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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옷을 만들기로 한다. 그가 숙련공인지 아닌지, 기술적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사실 크게 상관은 없다. 전통적인 옷 제조 방식은 물론 소중하고, 그 가치를 알고 제품을 사주는 이들이 계속 존재해 이어져야 하겠지만 때로 상상력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도 있다. 방식은 다양할 수록 좋은 게 많이 생긴다.

일본에서 온 '다른 방식'의 옷이 한때 각광을 받은 것에 그때까지와 뭔가 다른 새로움 - 그리고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세상 - 덕도 있었다. 이제는 그런 것들도 다 녹아들어 버려서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프라발 구룽이나 필립 림 같은 이들이 과연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여튼 만들고 싶은 걸 보다 명확히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넓게 자신만의 아이덴터티를 두를 수 있다면 그걸로도 된다. 옷을 만들 사람들이야 필요할 때 고용하면 된다(물론 숙련공을 알아보는 눈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라다가, 예전에 헬무트 랑이 이런 식으로 일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떤 옷을 만들고 싶은지, 그래서 어떤 옷을 만들었는지는 누가 옆에서 간섭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옷에 뭔가 다른 부분은 있다. 빈폴이나 유니클로의 옷 하나하나의 디자이너가 누군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시장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유니클로라는 거대한 컨셉을 결정하고 밀어붙이는 마케팅 디렉터가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옷에 어떤 사람의 이름이 붙어있다는 건 지금 이 시간에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듣지 않고 케이티 페리를 듣겠다처럼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냥 옷이 아니다. 그냥 옷이 필요하다면 굳이 이런 데다 큰 돈을 쓸 이유가 없다.

또한 내 좋은 걸 만들겠다는 마음가짐 역시 시장에 나왔을 땐 약간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랩 스커트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패션의 역사도 개입되지 않지만, 그걸 구입하러 온 사람들 머리 속에는 그런 게 남아있다. 예컨대 5년 전에 OO 매장에서 본 거랑 똑같잖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거나, 혹은 감각적으로 알아채고 있다면 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물론 훌륭한 평가를 받을 만한 옷을 내놓고 있을테다.
 
사람 이름이 붙어있는 비싼 옷은 완성도가 중요하다라고들 하지만 필연적인 건 아니다. 형편없는 퀄러티의 옷이라도 그 옷이 지닌 '무언가'와 희소성 때문에 비싼 비용을 지불할 구매자가 계속 나타난다면 그걸로 된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가정은 드문 일이지만 이런 경향은 분명히 있다. 언젠가부터 자신이 스페셜하고 독특하고 패셔너블하다 라는 아우라를 풍기기 위해 '독특함'이라는 정해진 유니폼을 입는 거에서 한 칸도 안 나가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데(그런 옷이 전달하는 메세지란 난 비싸다 밖에 없다) 그럴수록 반대 급부는 소중해진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옷들이 매장을 가득 채운다. 여기까지가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약간 다른 시점이 만들어진다. 누구나 옷을 만들지는 않지만 누구나 옷을 입는다. 이게 만들어 내는 패션의 재미 중 하나는 이런 것들을 취합해 자신의 색을 드리우는 과정이다. 굳이 스폰서를 받지도 않으면서 쇼 윈도의 마네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요즘엔 또 그렇지도 않는 거 같지만). 그러므로 선택지들을 놓고 취합을 하고 새로운 구성을 만든다. 똑같은 머플러를 철수가 하고 있는 게 다르고 영희가 하고 있는 게 다르다. 몸의 형태와, 표정과, 태도와 결합한다. 광의의 의미로는 자아를 드러내는 방법이겠지만, 협의의 의미로 또한 자아를 감추고 사회와 닿는 부분을 연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디자이너들의 실험이 광대해지면 그것들만 가지고도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에 옷을 입는 이들의 실험이 줄어든다. 디자이너들의 실험이 정체를 보이면 반대로 옷을 입는 이들이 빤한 것들을 모아다가 새로운 뷰를 만들어 낸다. 이게 끊임없이 반복되는데 지금은 후자로 가는 길의 중간 어디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옷을 입는 사람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은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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