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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원인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한 디자이너의 컨셉을 좋아하며 거기서 나오는 신상 안에서 구매 목록을 만드는 형태의 쇼핑 패턴이 이제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도 무슨 가문에서 새로운 옷이 필요하면 으례 찾아가는 디자이너 누구 식의 구매 방식이 일부 사람들에게 존재했을 지 몰라도 완벽히 그런 식으로 돌아간 적은 없다. 주문이 아니라 상품이 된 이후엔 더욱 그렇다. 코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몫이고, 여러 브랜드를 꿰뚫어보며 자신과 매칭되는 걸 찾아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미술품을 예로 들자면 미술 시장에서의 평가와,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의 평가와, 미술을 평론하는 평론가의 평가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패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뉴스와 신제품 속에서 참으로 뜬금없는 걸 선택하는 듯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이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는 이번 시즌의 쇼핑 목록을 만들기 위해서, 누구는 이번 시즌의 경향을 글로 써보기 위해서, 누구는 이번 호 잡지에 화보를 만들어 넣기 위해서 이런 소식들을 듣고 본다.
예를 들어 위 사진에 알렉산더 왕의 블랙 미니 스커트와 레드 펌프스가 보인다. 이 둘은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그저 알렉산더 왕의 이번 시즌 컬렉션 안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흔하디 흔한 블랙 미니 스커트고 흔하디 흔한 레드 스웨이드 펌프스다. 그냥 던져놓으면 신제품들을 꼼꼼하게 숙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이게 알렉산더 왕인지 뭔지 알 수도 없다. '알렉산더 왕 만의 어떤 것' 같은 건 없다.
이건 이런 방식의 디자인을 선택한 디자이너의 불리한 점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돌&가나 베르사체처럼 자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이들에 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레이 카와쿠보나 헬무트 랑, 요지 야마모토 같은 디자이너에 비해 알렉산더 왕, 혹은 지금 이 시점 이런 방식의 작업을 끌고 있는 디자이너나 트랜드가 뒤떨어지는 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시점이라면, 나중은 모를 일이니까) 이런 분에 대한 이야기는 할 게 없다. 차라리 1997년 즈음의헬무트 랑 컬렉션을 뒤적거리는 데 시간을 쓰겠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 이거 너무 예뻐요 같은 경우, 요즘 괜찮은 빨간 펌프스가 뭐가 있죠 등등 무척 유용할 수 있다. 사실 어차피 이건 장사라는 전제하에 이 쪽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 요즘 많은 이들이 그렇고, 매출에 일희일비할 수 밖에 없는 현실도 있고 해서 점점 더 '재질 좋고 훌륭한 광고 사진이 있는 H&M같은 옷'들이 디자이너 컬렉션에 많이 나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 와중에도 뭔가 뜬금없이 아니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허접한 컬렉션만 선보이던 디자이너의 신제품 리스트 사이에 껴있는 어찌 보면 근사해 보이는 드레스라든가, 미니멀리스트 디자이너 제품 사이에 껴 있는 팝아트 풍의 구두, 화려하지만 촌티나는 계열에서 튀어나온 시크하고 단아한 티셔츠 등등등등.
이런 것들은 쇼핑을 위한 접근의 경우엔 큰 의미가 있다. 어차피 그게 뭐든 큰 상관은 없기 때문이다. 알맞은 네임 밸류가 있다면 더 좋다. 뭐 이번에는 얘네도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정도만 타협하면 문제가 없다. 어차피 자신이 구성하는 코디의 문제다. 그리고 정보를 다 파악할 수도 없다. 돈 버느라고 바쁘던 사람이 이제 비싼 시계 한 번 사보자 하면서 찾아간 곳이 바쉐론이나 롤렉스가 될 지 아니면 위블로나 프랭크 뮬러가 될 지는 어쩌면 운의 영역이다.
쇼핑 목록 작성이 아닌 경우엔 약간 다르다. 그것은 역변을 위한 시그널링일 수도 있고, 그저 뒷걸음치다 잡은 쥐일 수도 있다. 한 두개 떨어진 제품만 가지고 뭔가 알아내는 탁견의 에디터들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 나는 무리다. 그래도 진기한 게 등장하면 혹시나? 하면서 약간은 더 부담없는 블로그에 올리기도 한다. 요즘엔 트위터에도 있으니까. 보는 이들에게 각자의 맥락이 있으니 반응도 전혀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상상력의 폭이 약간 넓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그런 것들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바닷가 모래 사장 어딘가에 진주가 한 두개 있다고 해도, 거기는 그저 모래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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