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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관심을 두고 있는 디자이너들

by macrostar 201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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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좋아하는 디자이너나 요즘 관심이 가는 디자이너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취향의 오지랖이 너무 넓은 탓인지 딱히 골라 내기가 어렵다. 어차피 각자의 길로 승부를 보는 곳이고 뭐 다들 나름 잘 하고 있다. 난 누군가의 팬이 되기엔 그른 인생인 것 같다. 하지만 요즘 관심이 가는 디자이너라면 약간 다르다.

요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디자이너들은 줄리앙 맥도날드, 이리스 반 허펜, 피비 잉글리시, 크리스티나 레당, 팜 이볼 등이다. 뭐 잘난 척 하려고 듣도 보도 못한 밴드 이름이나 감독 이름을 꺼내려는 건 아니다. 신진급 디자이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제한된 여건 안에서 지금까지는 여하튼 재미있는 걸 하고 있다. 아직 어설프거나, 무리를 하고 있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하라가 만개하는 모습을 보며 카라의 팬으로서 희열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라고 하면 아마 제일 가까운 기분일 것 같다.


레당 2012 FW, Take Four. 사진은 더 스켑틱 닷컴(링크).

물론 스킨헤드, 테디 보이, 아방가르드 같은 걸 레퍼런스로 삼아 갱판을 부리는 젊은 디자이너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친 시절이 있었고, 이런 리프레시들이 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물 네 살 때였다면 이게 진짜지 하면서 두근거렸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시절은 살짝 지나버린 거 같다. 좀 더 조근조근한 실험에 더 호감을 느낀다. 한두 번의 큰 파도보다 밀물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물이 더 무서운 법이다.

물론 쓰나미처럼 밀어칠 수 있다면야 그런 디자이너를 동시대에 목격하는 건 패션 디자인의 팬으로서 행운이 되겠지만. 이들이 어떤 작업을 낼 지도 궁금하지만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도 궁금하다. 스트리트 웨어나 액세서리로 빠지지 않고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 길은 쉽지 않다. 디자이너 하우스 신은 80년대 쯤에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90년 대, 2000년 대를 지나면서 만개했다. 지금은 헤리티지와 명성, 그에 맞는 이미지와 노하우를 지니고 좀 더 굳건히 탑을 쌓아 올리면서 중동과 아시아로 시장을 넓히고 있다. 그 뒤에서는 LVMH나 PPR같은 거대한 기업들이 서포트를 한다.

이 시절은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재능있는 디자이너들에게는 행운 그 자체였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95년에 세인트 마틴을 나왔고 97년에 클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맥퀸은 95년에 졸업하고 96년 지방시의 헤드 디자이너가 되었고, 크리스토프 데카린은 에스모드에서 나오자마자 파코 라반의 아트 디렉터가 되었다. 리카르도 티시도 졸업하고 5년 만에 지방시 오 뜨 꾸뛰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크리스토퍼 케인 정도가 82년 생으로 거의 막차다. 그는 세인트 마틴에 있을 때부터 각종 상을 휩쓸었고, 2005년 랑콤 컬러 어워드에서 상을 수상하면서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2009년 캡슐 컬렉션으로 Versus를 부활시키며 본격적으로 최전선에 이름을 올린다.

간간히 부침이 있고, 그 사이에 사라진 사람도 몇 명 있지만 90년대, 00년대에 임명된 대부분은 지금 성장의 견인차가 되었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물러날 이유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라 버튼을 생각해 보면 된다. 사라 버튼은 알렉산더 맥퀸에 인턴으로 들어갔다가 97년부터 맥퀸의 풀 타임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2010년 맥퀸이 자살하고 나서 꽤 많은 염려들이 있었지만 그는 자리가 생기자 곧바로 만개하며 보란 듯이 자신의 색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만약 맥퀸이 죽지 않았다면 사라 버튼에게 그런 기회가 생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무척 회의적이다. 이 점은 사라 버튼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보면 매우 조심스럽게 맥퀸의 불행과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둘은 다섯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맥퀸이 살아있었다면 사라 버튼은 계속 그 자리에 만족하든지, 아니면 버티다가 운 좋게 ‘사고’가 난 다른 디자이너 하우스의 디렉터 자리로 들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 지는 알 수 없다. 맥퀸이 이브 생 로랑만큼 오래 일해버리면 그때는 말짱 꽝이다. 찰스 황태자를 봐라. 재능이나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인생들은 널려있다.

존 갈리아노가 사고를 치고 디오르에서 나가자 자리가 하나 비어버렸다. 디자이너 하우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60년생, 70년 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아트 디렉터/헤드 디자이너 들이 뭉텅거리며 도미노처럼 자리 이동을 하던 모습을 바로 얼마 전에 목격했었다. 그 한 자리는 질 샌더의 라프 시몬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질 샌더 자리는 질 샌더 아주머니가 돌아오는 바람에 신규 인력 창조에는 실패했다. 저 맨 위에 나열했던 디자이너들에게 이런 기회가 생기는 건 앞으로 별스러운 행운이 있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일단 전공을 했고, 데뷔를 했고, 재능이 있다고 소문이 조금씩 난 이들에게 이제 무슨 길이 있을까. 갑자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되어 인생이 바뀌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자리가 없다. 들어가도 디렉터는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사라 버튼의 길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 번 빈 자리는 아마 샤넬이나 아르마니, 질 샌더 정도가 될텐데 그래봐야 3명이다. 그 사이에 딱히 디자이너 하우스의 수가 확 늘어날 리도 만무하다. 지금은 덩어리들이 뭉치며 커지는 시기다. 혼자 힘으로 세상을 상대할 수 있던 시절은 거의 지나갔다.

재능이 무지하게 많아 LVMH나 PPR의 직접 투자를 받는 방법도 있다. 또 SPA 기업의 신진 디자이너와의 콜래보레이션 같은 것도 좋은 기회다. 유니클로는 매년 그런 작업을 하고 매장에 내 놓는다. 이는 디올처럼 이름만 가지고도 사람들이 매장 문을 여는 일이 있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투자를 받았다는 건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

이 산업을 떠나지 않는다면 마지막은 자기 이름으로 된 레이블을 키우는 거다.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다. 저 위에서 말한 양적 고도 성장의 시기에 앤트워프 식스나 헬무트 랑, 크리스토퍼 케인, 알렉산더 맥퀸, 빅토 앤 롤프 등등이 자기 이름의 브랜드를 만들었고 성공했다. 시장이 형성되고 기존 틀이 흔들리며 호황이 시작되기 시작할 때는 이런 기회들이 훨씬 많다. 지금은 그렇게 까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공의 사례들은 나오게 되어있다. 뭐 실력은 당연히 있어야하고 거기에 운도 따라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나는 패션계에서 이렇게 성공했어요, 니들도 할 수 있어' 류의 책도 낼 수 있으니 부수입도 기대된다.



Iris van Herpen, 사진은 베를린 패션위크 홈페이지(링크)

창창한 미래 따위 어떻게 될 지 알 수도 없고, 10년 전 선배들처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디자이너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턱턱 들어가는 일이 있을 리도 없는 상황을 구경꾼들만 아는 게 아니라 저 당사자들도 이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세상에 옷을 선보이는 길에 들어섰고, 제한된 환경 속에서 각자의 길을 선택해 무심한 듯 다리를 옮기고 있다.

뭐든 이렇게 제한되어 있으면, 그리고 이미 나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날아다니는 법이다. 큰 꿈은 꾸지 못하겠지만, 다음 시즌 패션쇼를 부족하지 않게 준비만 할 수 있어도, 그걸 계속할 수만 있어도 사실 성공이다. 그냥 멋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막나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옷을 구입할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하기 싫은 짓은 하지 않는 감각이 필요하다. 팔리는 옷을 만들라며 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지만(예전에 ㅇㅈㅇ 디자이너가 아침 방송에 나와 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허허하고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옷이 필요한 사람들은 이미 H&M이나 유니클로에 가고 있다. 발렌티노같은 갑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분명 틈은 있을거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이런 고민은 사실 고도 성장기가 끝난 세상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줄리앙 맥도날드는 최근들어 뭔가 잘 풀리는 분위기가 있고, 이리스 반 허펜은 극단적 마이웨이를 가고 있는데 다행히 레이디 가가가 있다. 피비 잉글리시나 크리스티나 레당은 어느 순간 확 하고 날아갈 거 같은데 그 순간을 목격해보려고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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