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기드한 옷의 세계에 트윌 계열로 데님이 있다면 플레인 계열로 덕이 있다. 이 고밀도의 촘촘한 캔버스 코튼은 사선 무늬가 없다는 것만 가지고도 따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튼 이게 뒤적거려 보면 갑옷처럼 뻣뻣한 상태와 셔츠처럼 부드러운 상태 두 가지를 만날 수 있다. 이 중간 상황을 보기가 좀 힘든데 매물이 없거나, 기억이 없거나.
처음에는 뻣뻣하다가 부드러워지는 건데 이 사이에 세탁이 있지 않나 생각을 했었다. 이게 어느 정도는 맞는 게 로 데님 구입하면 소킹을 하듯 덕 코튼도 처음 구입하면 세탁을 좀 돌려야 한다. 처음 상태에서 팔을 움직이면 어깨가 함께 움직이고, 걸을 때마다 재킷 전체가 들썩거리는 게 정말 갑옷 같은 느낌이 들다가 그래도 입을 수 있는 옷 상태가 된다. 하지만 세탁만 가지고는 여기까지다. 게다가 코튼은 세탁을 하면 물기가 함께 빠져나가면서 마른 나무처럼 되기 때문에 더 뻣뻣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걸 어떻게 해야 빠르고 신속하게 부드러워질까 하는 게 고민 + 의문이었는데 : 아주 예전에 구입했던 랄프 로렌의 덕 코튼 재킷이 있다. 요새도 종종 빈티지 매장에서 발견할 수 있음.
진짜 몇십 년 전에 산 건데 당시의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이상한 옷이었고 그게 뭔지 파악하기도 어려울 때라 이건 대체 뭘까, 장난하나, 잘못 만든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저 워치 주머니는 구조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는 데(LEE와 다름) 예전에 마그네틱 지하철표 시절 가끔 이렇게라도 써먹어야지 하면서 저기다 넣고 다녔었다.
그러다가 이게 뭔지 알게 되고, 어떻게 하다가 중고 매장에서 아무도 칼하트를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절 상태 좋은 덕 초어 재킷을 싸게 샀었다. 이렇게 해서 두 개가 됐는데 랄프 로렌 버전은 사실 너무 커서 잘 안 입다가 몇 년 전에 아는 분을 줬다. 그때까지도 뻣뻣한 상태였음. 구입한 칼하트 버전은 몇 번 세탁기 돌렸고 대야에 넣고 발로 밟아댄 적도 있는데 역시 뻣뻣한 상태.
그러다가, 오늘은 그러다가가 많네, 얼마 전 랄프 로렌 버전을 다시 봤는데 컬러는 그대로인데(세탁은 하지 않았다는 의미), 플란넬 셔츠처럼 부드러워져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왜 내 손을 벗어난 이후 저렇게 됐을까 탐구해 본 결과 그냥 계속 자주 입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은 덕 코튼이 부드러워지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 무조건 경험치가 쌓여야 함. 나처럼 가을 재킷류를 너무 많이 손에 쥐고 있어서 순번표 붙여서 차례대로 입어도 일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해서는 어지간히 시간이 흘러도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 아니면 아예 워시드 버전을 사는 게 낫지만 그래서는 또 재미가 없지.
그런 이유로 올해 가을은 날씨가 좀 맞는다 싶으면 자주 입고 있다. 사이즈를 하나만 더 큰 거 샀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궁금했던 매물이 있네? 싸네? 사자"의 시절에는 몸에만 들어갈 거 같다면 사버리고 옷을 고르는 행위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해서 올해는 티셔츠에 칼하트, 셔츠에 칼하트, 스웨트셔츠에 칼하트 시즌을 거쳐 스웨터에 칼하트까지 왔다. 사실 이게 공기 중의 더위가 사라지자 마자부터 이 옷 입을 타이밍을 보다가 한 달 정도 사이에 진행된 일이긴 한데 그것만으로도 요 몇 년 간 입었던 횟수 만큼 한 달에 치워버리고 있다.
사실 이거 말고도 +Black, 데님 초어, 바람막이, M65 등등 입을 게 많았기 때문에(M65도 비슷한 데가 있어서 횟수를 늘리는 수 밖에 없다) 시간이 모자름.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가는 건 정말 싫지만 옷 입어볼 시간은 부족하다. 외투를 하루에 두 가지를 입을까 싶기도 하지만 EXP는 하루 만큼만 쌓이기 때문에 그건 별 효용이 없다. 입고 자면 또 모를까.
결론. 뻣뻣한 칼하트가 고민이신 분들은 옷 부드럽게 만들겠다고 삽질 같은 육체 노동을 할 거 까지는 없더라도 그냥 한 번이라도 더 입으세요. 그리고 일정 상태를 넘어서면 부드럽게 만들고자 하는 세탁은 안 하는 게 나은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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