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눈에 띄는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바라쿠타의 해링턴 재킷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람과 비를 막는 솔리드 쉘에 타탄 내피, 거친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특유의 디자인, 스티브 맥퀸과 제임스 딘 등의 스타일 아이콘, 영국 서브컬쳐 캐주얼스와 훌리건의 유니폼, 고급스러운 상류 문화부터 펑크나 스킨헤드 등 길거리 하위 문화 스토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옷.
하지만 이렇게 많은 패션의 도시 전설이 교차하고 있는 해링턴 재킷을 처음 보고, 입어 봤을 때 약간은 당혹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냥 너무 익숙한 점퍼였기 때문이다. 듣고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선구적인 옷이라면 무언가 다른 게 있겠지 했던 예상도 빗나갔다. 크게 다른 점이라면 생긴 거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싼 게 아닌가 하는 것 정도. 우리가 입는 옷의 조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이런 옷이 정말 지금도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로부터도 나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오리지널 해링턴 재킷이 지닌 매력을 조금은 깨닫고 있다. 확실히 이 옷은 어른의 옷이다.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든 자기 길을 꿋꿋이 가면서도 우악스럽게 고집 부리지 않고, 자기 영역을 확실하게 구축하고, 수많은 모조품과 응용품이 나와도 결국은 오리지널의 우수함을 더 분명하게 증명할 뿐이고, 지성과 감성 양쪽 측면 모두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 옷이다.
보통 해링턴 스타일의 재킷이라면 총장이 짧은 지퍼 업의 아우터웨어다. 예전에는 겉감을 고밀도 면으로 만들었지만 요즘은 혼방도 많다. 어깨는 래글런 형태고 소매는 버튼으로 고정하거나 립이 붙어 있다. 이중 버튼의 도그 이어 칼라가 있어서 목에 두를 수 있다. 버튼을 열면 강아지 귀처럼 늘어진다고 해서 도그 이어 칼라라고 한다. 골프공이 빠지지 않고 쉽게 꺼낼 수 있는 플랩이 달린 대각선 주머니가 양쪽에 있고 뒷면에는 우산 모양의 요크가 있다. 이 안쪽에는 통기 구멍이 있다. 디자인을 보면 살짝 내리는 비 정도에는 운동을 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하는 디테일을 여럿 볼 수 있다.
이 옷에는 이름과 유래 양쪽 모두에 경쟁적 논란이 있다. 해링턴 재킷이라는 명칭은 이 옷이 처음 나오고 한참 지난 다음에 붙였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끈 페이튼 플레이스라는 TV시리즈의 주요 캐릭터인 로드니 해링턴이 바라쿠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해 해링턴 재킷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지만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통용된다. 스윙 탑 혹은 스윙 재킷이라고도 한다. 이건 일본에서 아이비리그 패션을 선구적으로 도입했던 VAN Jacket의 이시즈 켄스케가 골프의 스윙에다가 상의를 의미하는 탑을 붙여서 만든 조어다.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으로 바라쿠타의 상품명인 G9가 있다. 바라쿠타는 영문자에 숫자 조합으로 제품 라인을 선보였는데 G는 골프를 의미하고 9는 9홀을 의미한다. G로 시작하는 제품은 여럿 더 있어서 코트나 파카 등도 들어있다. 이중 G4와 G9가 비슷하게 생겼는데 G4는 허리 쪽에 립이 없고 G9에는 립이 있다. 보통 해링턴 재킷이라고 하면 G9를 가리킨다. 해링턴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었지만 요즘에는 바라쿠타에서도 제품명에 G9 해링턴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바라쿠타는 존 밀러와 아이삭 밀러 형제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초창기에는 버버리나 아쿠아스큐텀 같은 브랜드의 레인코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자체 브랜드 제품을 만들어 내놓는데 이게 판매가 잘 되었고 이런 덕분에 밀러 형제는 지역 골프 클럽에 가입해 사회 엘리트에 합류할 기회를 얻는다. 이를 계기로 골프를 칠 때 입을 만한 짧은 방수 지퍼 재킷을 1937년에 개발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 존 밀러는 스코틀랜드 프레이저 클랜의 로바트 경을 설득해 프레이저 타탄을 사용할 허락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감에 타탄 무늬가 들어있는 해링턴 재킷이 완성되었다. 여기까지 내용으로 바라쿠타가 해링턴 스타일 재킷을 처음 선보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그렌펠이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렌펠은 1920년 대에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진 브랜드다. 그렌펠은 튼튼하고 가볍고 약간의 방수 기능이 있는 면 직물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는 1931년에 처음으로 짧은 길이의 올 웨더 골프 재킷을 선보였다. 연도로는 바라쿠타보다 앞서기 때문에 해링턴 스타일의 재킷을 먼저 내놨다고 주장하고 있고 여전히 이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짧은 길이에 방수 기능을 갖춘 운동용 아우터웨어라는 옷의 기술적, 기능적인 면에서는 누가 앞인지 논란이 있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해링턴 재킷의 원본으로 생각하고 있는 옷은 일단 바라쿠타 쪽이다.
대중화를 주도한 것도 바라쿠타였는데 본격적인 영역 확장은 미국에서 이뤄진다. 아이삭 밀러의 주도 아래 1950년대 부터 미국에 수출을 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골프 문화와 얽히면서 밥 호프나 빙 크로스비 같은 유명 인사들이 입었고 러기드하면서도 실용적이고 점잖은 디자인으로 아이비리그의 대학생들도 즐겨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7년 미국 브랜드 맥그리거에서도 경쟁 제품인 골프 재킷 드리즐러를 선보였다.
드리즐러는 영국 스타일의 골프 재킷을 미국식으로 해석한 옷이다. 드리즐은 이슬비를 의미하는 데 역시 발수, 방풍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드리즐러 재킷은 도그 이어 칼라 대신 평범한 포인트 칼라를 붙였는데 대신 칼라를 세워 고정시킬 수 있는 스트랩을 달았다. 그리고 양 사이드의 주머니가 인상적인데 원형 모서리의 사각형으로 주변을 더블 스티치로 둘렀다. 안감이 없이 트윌 치노 코튼을 사용했기 때문에 발수나 보온 측면에서는 약간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더 저렴하고 가볍게 입기 좋고 관리하기도 편하다.
맥그리거와 바라쿠타는 미국 시장에서 경쟁을 한다. 예를 들어 1956년에 나온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주인공 제임스 딘은 맥그리거의 빨간색 드리즐러 재킷을 입고 등장했다. 그리고 1958년에 나온 영화 ‘킹 크리올'에서는 주인공 엘비스 프레슬리가 바라쿠타의 G9 재킷을 입고 나왔다. 드리즐러 재킷도 TV 시리즈 덕을 보는데 1960년대 인기 TV 시리즈 도망자의 주인공 리처드 킴블이 극중 의상으로 자주 입고 나오면서 인기를 끌었다. 1968년 스티브 맥퀸은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에서 네이비 컬러의 해링턴 재킷을 입고 글라이더를 조종했다.
그리고 해링턴 스타일 재킷은 미국에서의 인기를 안고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다. 하지만 상류층과 지역 유지가 얽혀있는 탄생 배경과 다르게 반문화적인 서브컬쳐의 아이콘이 되어 영국의 거리에 등장한다. 영국의 극장에 헐리우드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되면서 반항적이고 반문화적인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그들이 영화를 보고 바라쿠타의 옷을 찾아 입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 1960년대 모드족을 비롯해 스쿠터 보이스, 펑크, 스킨헤드, 스카 등 여러 하위 문화에서 이 옷을 입었다. 입는 방식은 다들 달랐다. 모드족은 정장 위에 입었고, 스킨헤드는 빡빡 깎은 머리에 부츠, 셔츠에 멜빵을 메고 해링턴 재킷을 입었다. 펑크에서는 뱃지를 달고 등판에 낙서를 해서 입었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는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나 블러의 데이먼 알반 등 많은 브릿팝 아티스트들이 이 흐름을 이어 받았다.
이렇게 해링턴 스타일 재킷의 점잖은 솔리드 겉감에 영국 귀족풍 안감의 조합, 스포티하면서도 편리한 기능성은 직설과 반어로 동시에 사용되면서 기득권과 반문화적를 모두 포용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옷의 문화적 영향과 인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다니엘 크레이그, 킬러 엘리트에서 제이슨 스타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톰 하디가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클래식한 해링턴 재킷은 면 100%로 만들었고 최근 사용하는 얇고 가벼운 직물에 비해 더 무거운 느낌을 준다. 요즘 나오는 게 다루기는 더 편하지만 오리지널이 궁금하다면 빈티지를 뒤적이는 수 밖에 없다. 슬림핏에 짧은 총장이라 사이즈의 선택이 꽤 중요하다. 가능한 입어보면서 고르는 게 좋다. 적당히 편한 사이즈를 찾아냈고, 이후 함께 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저 자주, 오랫동안 입는 게 중요하다. 이런 옷이 지닌 고유의 매력은 입는 경험이 많아질 수록 분명하게 느끼는 법이다.
- 럭셔리M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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