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새로 냈으니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답이 좀 필요하지 않나 싶은 부분과 너무 시시콜콜해서 책에서는 굳이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를 보충하는 내용을 몇 개 써볼까 합니다. 그전에 책이 새로 나왔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링크).
여기서 의문을 가질 만한 건 단절의 의미입니다. 원래는 반동, 반발 이런 걸 생각했었는데 결론은 단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단절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패션은 이상을 제시합니다. 2024SS 컬렉션은 2024년 봄, 여름에 가잘 잘 나가고 멋진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죠. 여기서 잘 나가는 모습은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요. 그렇다고 정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디자이너들은 각자 제시를 합니다. 어떤 디자이너는 자신의 맥락을 중시하고, 어떤 디자이너는 자신의 맥락을 무시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2024년에 기대 선택을 합니다. 사실은 선택이 아니라 형성이 됩니다. 이게 멋진 거구나 하고 설득이 되는 거죠.
크게 봤을 때 예전에는 유럽 귀족 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옷의 카테고리가 거기서 나왔습니다. 심지어 군복, 운동복, 워크웨어도 그런 옷의 열화판입니다. 저걸 입을 수 없으니 비슷하고 간략하게 만든 옷입니다. 패션은 그런 문화를 반영합니다. 그런데 가끔 단절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틀이 바뀔 때죠. 세계의 틀이 바뀌면 부유층의 구성원이 바뀌고 그러면 패션이 만들려는 이상의 모습도 바뀝니다. 귀족 사회에서 부르주아 사회로 바뀔 때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계 진출로 알게 된 이그조틱한 이미지를 투영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옷은 늘어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로 고위직이라는 이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세대 교체가 되었죠. 한 사람이 의식 개혁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강력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패션이라는 산업의 특성 때문에 기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이후에도 미디어가 발전하고 영화와 음악이 강력한 선도 문화가 되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이상의 모습은 유럽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이상향을 가진 이들은 그들만의 서브컬쳐를 구성했죠. 그리고 이번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이건 패션의 글로벌화에 따른 결과입니다. 늦게 나타났지만 패션은 사실 멀리서 봤을 때 변화는 좀 느립니다. 빠른 척을 잘 할 뿐입니다. 이건 당연한 게 사회의 부유층 변화 속도에 맞춰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대중 문화는 더욱 강력해졌고 유럽 문화 중심 주의는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텀을 넘었습니다. 여기서 단절은 바로 이 지점을 말합니다.
대중 문화를 이끌던 미국의 옷(대략 1950년대 부터 시작되었다고 쳐도 패션에서 주류가 되는 데 80년 정도 걸린 거죠)이 이상형을 구성하는 주된 소재가 되었고, 거기에 전형적 성역할에 대한 거부, 문화/인종 다양성 등의 이슈가 합쳐지면서 약간 더 강력한 변화의 텀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변화는 필연적이라고 해도 모멘텀이 없으면 이뤄지지 않습니다. 트럼프 집권, 코로나 판데믹 등이 원인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세기가 바뀔 때 쯤의 단절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이 좀 있습니다. 그때는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해봐야 고급 양장점보다 좀 나은 규모의 개인 사업이었기 때문에 변화에 적응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2000년의 구찌와 2020년의 구찌와 2023년의 구찌는 전혀 다른 모습이고 가는 길도 다르지만 셋은 한 데 묶일 수 있습니다. GG 마크의 힘이 그만큼 강하고 이미지 변화 같은 걸 충분히 커버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밀어 붙일 정도로 케링은 자본과 채널이 충분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의 단절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맨날 이상한 옷 내놓고 비싸게 팔고 있는데 뭐 바뀐 게 있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변화는 맥락 위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GUCCI 로고의 스웨트는 10년 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옷입니다. 멋진 사람의 모습이 이미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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