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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옷을 고르는 이유

by macrostar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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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옷을 고르고 입는 이유는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날씨에 맞서 싸움, 평정심의 유지, 경험의 축적, 궁금함, 혼자 진행하는 작은 실험 등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중 궁금함과 작은 실험이 약간 문제인데 집에 자꾸 이상한 옷들이 늘어난다. 이게 내 일이라니까 라는 생각에 합리화를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하는 자신을 향한 의심이 사라지진 않는다.

 

일상을 구축하는 패션은 자원을 탕진하고 기한이 짧다는 점에서 미식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미식은 먹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말끔하고 좋은데 패션은 옷이라는 잔여물이 남는다는 문제가 있다. 여행지 호텔의 1회용 칫솔처럼 비록 1회용이지만 형체는 멀쩡히 남아있어서 계속 쓸 수는 있다. 게다가 이 옷이라는 게 수명이 상당히 길다. 이 전환을 잘 만들어 놓은 옷을 좋아할 듯 하지만 실상은 인스턴트성이 강할 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아무튼 저런 생각을 가지고 착장 생활을 하는 데 그럼에도 이옷은 계속 입어도 되겠다 싶게 마음 편하고, 아늑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이고, 신경 쓸 데가 없는 옷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필슨의 매키노 크루저 울 자켓, 칼하트의 트래디셔널 자켓, 노스페이스의 맥머도 3, 엔지니어드 가먼츠의 익스플로러 셔츠 등 좋아하는 옷은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매일 아무 생각 없이 입는다는 건 갸우뚱하게 되는 면이 있다. 훌륭해도 어딘가 마음에 걸리고, 어딘가 불편하다.

 

또한 매칭에 있어 완전히 자유로운 옷도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겨울 아우터가 가능성이 약간 있다. 뭘 입어도 그 위를 덮어버리는 폭력적인 성향은 아무튼 추우면 안되지 않냐라는 정당성 아래에 합당화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금씩 마음에 걸리는 데가 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할 때 생각나는 옷이 있긴 하다.

 

 

겉감은 고어텍스 로고가 붙어있는 노스페이스의 쉘이다. 가슴 옆에 주머니가 두 개 있는데 주머니가 아니라 구멍이다. 지퍼를 열면 뻥 뚫려있다. 사실 이 옷은 약간 수상하다. 중고 매장에서 2 in 1 매칭으로 눕시를 활용할 방안을 찾다가 발견해서 구입했는데 진짜라고 하기도 가짜구나 하기에도 탐탁치 않은 구석들이 있다. 그러든 저러든 저렴하게 구입했고 상당히 튼튼한 쉘이다.

 

안에는 역시 중고 매장에서 구입한 눕시 2를 결합했다. 이 역시 탐탁치 않은 구석들이 있는데 미국판이긴 한데 살 때부터 팔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교환할까 했지만 M사이즈 미국판(지퍼 방향이 반대다) 눕시를 저렴하게 구하기가 은근 어려워서 뭐라뭐라 투덜거리는 후기만 남겨놓고 리페어 스티커를 붙여서 쓰고 있다. 뭐 미안하다면서 쿠폰도 준다고 했는데 그런다고 구멍이 메꿔지진 않지. 

 

중고 매장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중고 매장에 옷 정보를 올릴 때는 제품이 뭔지 파악할 수 있는 라벨의 상표 번호, 제조 연도(이런 걸 알면 구글에서 찾아 어떻게 생긴 건지 파악할 수 있다)와 함께 그 옷이 가진 흠을 잘 알려줘야 한다. 물론 이 흠이라는 건 뜯어지거나 낡은 부분, 사이즈 수선 여부 같은 것들이다. 이 둘을 감추고 얼버무리면서 올리는 놈들이 너무 많아. 다른 거 다 필요없고 이 정도만 알려줘도 생김새와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흠을 보며 가격의 추산이 가능하다. 이런 거 대충 얼버무리면서 거래하려는 건 대체 얼마나 부자 되겠다고 그러는 건지. 아무튼 이런 부분에 대한 자세한 고지가 없는 건 구입하지 않는 게 원칙. 하지만 이 경우처럼 속이거나 파는 사람이 놓쳤다고 하면 할 말이 없게 되지.

 

다시 위 옷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결국 위 옷은 내 맘대로 조합한 거고 노스페이스 쪽에서는 모르는 옷이다. 그리고 그 조합도 연도도 맞지 않고 심지어 노스페이스에서 낸 건지도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그럼에도 이 옷은 막 입기에 정말 좋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면 모자가 탈착형인 점인데 그냥 붙어있는 걸 더 선호한다. 모자를 떼는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음. 필요 없으면 없는 걸 사면 되잖아. 굳이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입는 사람이 정말 있나? 뭐 세상은 넓고 각자의 사정도 다양하니 있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튼튼한 쉘과 든든한 이너 다운이 결합되었을 때 시너지가 얼마나 좋은지 입을 때마다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별로 무겁지 않아서 달리기도 할 수 있다. 어디 찢어져도 덕테이프 붙여 입고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애초에 투박하다. 사실은 겉감 리페어와 심실링 리페어가 있기 때문에 그걸 쓰면 되지만. 이런 게 또 없나 싶은 열망에 수많은 옷과 조합의 시행 착오들이 여전히 끊임없이 쌓인다.

 

겨울이 다가옵니다. 다들 따뜻하고 포근한 옷 입으시고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쉬이 지치지 마시고, 냉철하고 가볍고 신중하게 그리고 부디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잘 헤쳐나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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