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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면바지 하나를 떠나 보내며

by macrostar 2020.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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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조금씩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일단 수선을 해본다. 그러고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때는 말 그대로 전면적으로 붕괴가 시작된다. 어디 손을 쓸 새도 없이 여기저기에 문제들이 누적된다. 색이 빠지고 뭐 이런 것들은 아무 일도 아니다. 전체를 지탱해주던 실들이 낡아서 풀려나가고 얄쌍한 주머니 천은 이미 수명을 다해 아무 것도 집어 넣을 수 없다. 찬 바람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허벅지 맨살이 닿는다.

 

 

그래도 괜찮았던 시절

 

붕괴는 이렇게 전면적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에는 만듦새의 차이, 제작된 소재의 차이 같은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거다. 물론 입고 다녀도 되겠지만 이 바지에게는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거라는 신뢰와 믿음 또한 중요하다. 이 바지를 입고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많은 곳을 다녔다. 게다가 그러는 사이에 트윌 치노가 좋아져서 계속 입기도 하고, 왠지 꼴도 보기 싫어져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기도 했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왠지 좋아지는 시기가 찾아와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도 입고 다녔다.

 

이 바지에게는 두 번의 큰 전환점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구입한 길이 그대로 롤업을 해서 몇 년을 입고 다녔고, 그러다가 왠지 밑단을 조금 짧게 줄이고 싶어져서 매장에 가서 수선을 했다(기쁘게도 무료로 해주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난 후 위 사진 처럼 땜빵을 여기저기 시작했고, 이윽고 붕괴의 시점에 도달했다. 부디 지속 가능의 사이클 속으로 잘 안착해 재활용되어 더 멋지고 좋은 다른 무엇인가로 다시 태어나 더 멋지고 좋은 시절을 보낼 수 있길. 안녕 그린색 빈티지 치노 바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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