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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배타적인 옷, 폴로의 데님 스윙탑

by macrostar 2019.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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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세상에 대한 배타적인 기분을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예컨대 3일 후가 마감인데 생각나는 게 아무 것도 없거나, 들어올 돈이 안 들어와서 이 일을 이제 어쩌나... 하고 있거나, 오늘은 닥치고 일만 해야 한다는 날이거나, 2주 째 사람을 만나질 않아 말하려고 입을 움직이면 어색하거나 할 때 등등. 적대적인 건 아니다. 적대적까지 가려면 이 보다는 더 큰 일이어야 한다.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 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런 배타적인 기분을 드러내고 싶을 때 입고 싶은 옷이 있다. 일상용으로 사용하는 등산복 종류가 그런 기운이 많기는 한데 그런 옷은 지나가다 보면 등산복이네 하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저 옷은 뭐지?가 딱 좋다. 그러므로 옷의 형태가 컬러도 희미해 사람의 존재감도 함께 지워지는 옷이거나 또는 뭔가 삐툴어진 옷, 만든 사람 혹은 그 시대의 마음 속 광기가 살짝 투사되어 있는 옷이 적당하다. 이중에서 후자는 어글리 프리티의 재료가 되었던 옷이 뭔가 생각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80, 90년대 스트리트의 옷들 중 일부는 확실히 정도라는 걸 손쉽게들 넘어서고 있었다. 펑크의 찢고 낙서를 한 옷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의도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는 옷에는 결코 괴상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법이다. 옷이 삐툴어져 있으면 안된다. 그저 시대와 사람들이 삐툴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런 옷이 메이저로 행세하는 시대가 나올 수 있다.

 

 

 

좋아하는 옷 중 하나로 폴로에서 80, 90년대에 나왔던 데님 스윙탑이 있다. 이 옷은 중고로 구입했었는데 사진만 보고 왠지 좋아서 사버렸다. 위 사진은 역시 잘 못 찍었고(요새 방이 옷의 풀샷을 찍을 수 없는 상태다) 괜찮은 상태의 옷을 검색해 보면 이런 모습이다.

 

 

 

파란 데님에 빨간 안감. 손목과 허리의 고무줄, 사이드 주머니의 똑딱이 단추. 폴로의 데님 스윙톱이다. 스윙탑이라는 말은 골프가 생각나는 데 이런 옷을 입고 골프를 칠 리는 없다. 사실 스윙탑은 일본식 영어이긴 하다. 도리즈라라고도 하는데 드리즐러 재킷의 일본식 용어로 일본 브랜드가 상표 등록을 해놓고 있다. 그렇다고 G-9라고 하면 남(바라쿠타)의 옷이고 왠지 영국풍이다. 해링턴 자켓이라고도 하는데 이러면 어쩐지 시트콤 같다. 위 사진은 상태가 꽤 좋은데 좀 입어서 80, 90년대 갭이나 폴로 등 미국 브랜드 데님 옷 특유의 너저분함이 나타나는 게 제일 좋다.

 

 

이 정도가 딱 좋다.

 

 

희끗거리는 데님과 환한 빨간색은 이상하게 어울린다. 보자마자 함께 하면 안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함께 붙여 놓는 사람들이 있다. 슈가 케인이나 예전 빈티지 데님 옷을 보면 데님에 빨간 실을 사용하는 옷들이 있는 데 그런 건 별로다. 실 같은 걸로는 저런 강렬한 인상을 만들 수 없다. 또한 길이가 짧고, 가슴폭은 넓고, 허리는 조여있어야 한다. 봄버 재킷이라는 건 정말 이상한 옷이다. 입으면서도 대체 왜 입는지, 대체 왜 이런 걸 만들었는지(일상용으로, 군대야 쓸 데가 있었겠지) 잘 모르겠다. 

 

 

사실 폴로의 데님 해링턴 재킷은 은근 종류가 많다. 위 조합을 기준으로 칼라가 코듀로이인 것도 있고, 칼라 뒤만 빨간 플리스를 대놓은 것도 있다. 빨간 안감이 없는 것도 있고, 사이드 주머니 스냅 버튼이 없는 것도 있고, 아예 칼라 대신에 MA-1처럼 목과 손목에 리브를 대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미국, 일본, 한국, 캐나다 등등 만든 나라도 많다.

 

 

그렇지만 표준 기본형은 역시 미국에서 만들었고 겉감 데님, 안감 빨간 코튼, 손목과 허리에 고무줄, 사이드 포켓에 스냅 버튼 버전이다. 은색 버튼 매우 중요하다. 저게 없으면 재미가 없다. 칼라는 코듀로이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다. 하지만 이 옷은 칼라가 살짝 짧은 게 매력인데 코듀로이 버전은 지나치게 칼라의 존재감이 있긴 하다. 

 

 

찾아보면 꽤 다양하게들 입는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요런 것도 있다.

 

 

폴로의 빨간 안감 데님 해링턴은 사실 한때 유행을 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가격이 상당히 이상하게 형성되어 있다. 어떤 데서는 이상하게 비싸게 받고(하지만 유행이 지나서 팔리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이상하게 싸게 판다. 이런 옷은 찾는 사람은 상태 좋고 맞는 사이즈를 열심히 찾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마 누가 그냥 줘도 안 입을 거기 때문에 그런 격차가 형성된다.

 

가지고 있으면 비싸질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런 건 리바이스 혹은 유명한 사람이 얽힌 특별한 경우에나 해당한다. 데님, 해링턴, 낡음, 기괴한 색 조합이라는 건 다시 나오면 나왔지 사람들이 빈티지를 다시 찾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제 주인을 찾아주든지 아니면 가끔 배타적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싶을 때 입으면 된다.

 

 

그렇지만 이 옷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사진의 강렬한 생김새에 비해 막상 입으면 생각보다 좋잖아, 라는 생각이 들어 버린다. 폴로의 해링턴은 팔, 가슴, 총장 등 길이의 조화가 정말 훌륭하다. 바라쿠타나 그렌펠하고는 다르다. VAN Jacket 같은 회사는 솔직히 스윙탑이 뭔지도 모르면서 만들어 팔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뒤에 프린트가 귀여우니까(심지어 진지해서 웃기다) 가지고 있다가 벽에 걸어 놓을 수 있는 게 좋긴 하다.

 

또 하나는 이게 꽤 두껍고 무겁다는 거다. 추위 블락 측면에서 리바이스 데님 재킷에 파일 라이닝 붙어 있는 것보다 한 단계 위로 분명 봄, 가을 옷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요즘 날씨엔 못 입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의 겨울은 결코 날 수 없다. 그러므로 2월 초에서 3월이 되기 전, 11월 말에서 12월 눈오기 전 정도까지 입을 수 있는 날이 상당히 작은데 그나마 있는 날이 지구 온난화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가죽 재킷, 헤비 코튼 코트, 쉬어링 데님 재킷 등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 기간 안에 배타적 마음이 생겨나야 한다. 그럴 때 입으려고 구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라도 써가며 옷장에 저게 있지라는 기억을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이 옷의 라이벌에 해당하는 옷이 몇 가지 있다. 예컨대 생경한 빨강과 파랑 계통의 조화, 옷 총장이 그다지 길지 않고 허리가 조여지는 봄버형 옷들이다.

 

 

 

파타고니아의 플리스 라인드 재킷은 요새도 나온다. 이런 인상적인 컬러도 좋지만 밝은 블루컬러 처럼 존재감 없는 것도 꽤 훌륭하다.

 

 

 

사실 이런 컬러 조합은 꽤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근본이 평화롭다. 지퍼를 채우고 돌아다닐 때 가끔 드러날 핑크 안감도 멋지다.

 

 

 

컬럼비아에서 1986년에 내놓았던 부가부라는 재킷도 있다.

 

 

 

이 옷은 90년대에 상당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기억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나름 있다. 역시 핑크 안감인데 나일론 점퍼 계열은 빨간 색이 들어가 봤자 그다지 어색하지가 않고 그냥 평범한 등산복이 되버린다. 사실 고프코어 인기가 시작될 무렵인 2016년 쯤 컬럼비아가 돌아가는 판세를 보고 뭔가 생각이 났는지 부가부 복각판을 내놨었다. 

 

 

 

하지만 그들은 난장을 치는 법을 이미 망각했고 파랑과 핑크를 폼나게 함께 쓰는 법을 알아버렸다. 이렇게 웃기지 않아서야 부가부를 일부러 입을 이유가 있을까. 전혀 배타적인 느낌이 없다.

 

 

그런데 사실 요새 컬럼비아 미국판 옷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가 나온 제품들을 보면 뭔가 이상한 기운(어떤 선을 넘어버린 재미없음이라고 할까, 이 정도 되면 좀 자세히 봐야 한다)이 흐르고 있는 데 그게 명확히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꽤 흥미진진하다. 패셔너블한 노스페이스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기운의 파타고니아와는 다르다.

 

 

결론을 말하자면 폴로의 데님 스윙탑 재킷은 꽤 좋고 재미있는 옷이다. 다만 입을 타이밍이 없을 뿐이다. 폴로에서 종종 저런 삐툴어진 옷이 나오는 데 요새는 그렇게 많지가 않다. 차라리 아울렛을 가면 이건 뭐지 싶은 것들을 종종 만나긴 한다. 어디에서든 저런 옷이 많아지면 조금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한다. 크로스 컬러스가 전시를 하고 있다는 데(링크) 거기도 이런 거 참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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