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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meme이 된 패션

by macrostar 2019.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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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보냈던 글의 축약 정리와 약간의 보충



나일론 레인 코트와 DHL 로고 티셔츠, 3개 세트 언더웨어 티셔츠, 서류 묶는 클립과 커다란 단색 나일론 패딩, 더러운 스니커즈 그리고 반을 잘랐다 다시 붙인 청바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를 이해하는 데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브랜드의 역사, 제품의 고품질, 정교한 제작 등은 중요한 덕목일까? 그렇긴 한데 어느 정도까지는 이다. 조악하면 안되겠지만 최상은 아니어도 괜찮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누가 내놓은 건가 하는 점, 어떤 로고가 붙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소비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까. 이전에도 말했듯 패션은 과몰입을 기반으로 한다. 더 몰입하게 만드는 게 핵심이다. 훌륭한 브랜드는 그걸 잘 유도해 낸다. 높은 가격대의 물건을 살 수 있는 혹은 살 용의가 있는 비슷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끼리 교류한다. 꼭 폐쇄형 커뮤니티가 아니어도 괜찮다. 팬덤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듯 SNS는 오픈형 커뮤니티와 비슷하고 게다가 더 빠르게 작동한다. 의견을 주고 받으면 정보량이 늘어난다. 내부자 혹은 외부자에 의해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정리가 된다.    


다시 앞으로 돌려서 슈프림은 이 방면으로 유명하다. 쌍절곤과 애완견 밥그릇, 망치와 소화기, 휴대용 젓가락까지 별의 별 제품을 다 내놓은 적이 있다. 또한 어떤 제품이든 선명한 빨간 바탕에 하얀색으로 새겨진 슈프림이라는 글자가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물론이다. 


사실 고급 브랜드들이 이렇게 소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제품을 내놓는 건 요즘에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다. 홀리데이 기프트 같은 이름으로 프라다에서는 가죽 케이스가 딸린 삼각자도 나온 적이 있고 티파니의 실버 요요는 꽤 인기를 끌었다. 구찌에서는 벽난로용 삽이 나온 적도 있고 에르메스는 꾸준하게 가죽으로 만든 메모지 케이스같은 걸 내놓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말하자면 회사 고위층의 책상 한 켠의 고급스러운 유머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약간 다르다. 저 제품들은 나이키의 텐 시리즈 스니커즈나 폴로의 CP-93 리이슈 스웨트 후디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스트리트를 떠돌아다니거나 특정 브랜드 제품을 차곡차곡 수집하는 컬렉터들과 함께 한다. 


게다가 세상을 즐기는 방식이 예전과 다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가 일상화되면서 세상 어디 구석에서 하는 일도 전세계의 반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번 제대로 웃기면 인터넷 밈(meme)이 되고 유명 인사가 된다. 농담은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위험해지기도 했다. 홀린 듯 고층 건물 꼭대기 난간에 오르거나 벼랑 끝이나 활화산에 접근하기도 한다. 



하이 패션 역시 비슷한 접근을 하고 있다. 다만 옷을 입는 정도로는 목숨이 위태로워 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더 안전하다. 패션 브랜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쉐어가 될 만한 옷과 신발, 광고 캠페인을 만든다. 방식이 뭐든 여기엔 반드시 사람들이 모여 떠들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고풍스런 패션 하우스에서 왜 저런 걸 내놓는 걸까, 뭐하는 걸까, 가격이 말이 되냐, 저게 팔리냐 라는 의문은 유머가 되고 “좋아요”와 “RT”를 타고 세상을 빙빙 떠돌게 된다.  


게다가 누구나 여기에 동참할 수도 있다. 그게 소비에 의해 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벤트다. 그저 돈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어딘가 가야 구할는 것도 있고 어딘가에 있어야 구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 사이에서 특정 제품의 가치가 고평가된다. 알아봐 주는 사람들은 비슷한 곳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든 상관이 없다. 한정판 나이키를 두고 서 있는 긴 줄에서 새 동료를 만날 수도 있다.


이건 예전에 고등학교 교실에서 운동화를 두고 벌어지는 일과 비슷하다. 모르는 사람들에게야 그냥 나이키와 아디다스 로고가 달린 운동화일 뿐이지만 뭘 좀 아는 사람들은 저걸 쟤가 어떻게 신고 있을까, 대체 어디서 구했을까 등등으로 얼룩진 혼돈과 좌절, 부러움에 빠진다. 


또한 뮤지션의 콘서트 굿즈나 아이돌 굿즈의 소비 패턴과 상당히 비슷하다. 특정 그룹의 응원봉을 구입하는 이유는 그게 발광이 잘 되거나, 기능이 많거나, 더 멋지거나 혹은 더 예뻐서가 아니다. 근데 발광이 잘 되고 기능이 많거나 더 멋지거나 더 예쁘다면 더 좋을 거다. 그런 경우 가격을 어디까지 올릴 수 있을까. 


특히 비공식 굿즈들과 비교해 오피셜은 특별한 점이 있다. 그저 저작권 문제만은 아니다. 특별한 출처를 가지고 있고 나온 시기와 그 이벤트를 가늠할 수 있다. 팬들에게는 제품 하나하나에 그걸 구하기 위한 노력과 그 길었던 줄, 어떤 우연과 마치 꿈 같았던 몇월 며칠의 공연 등 사연이 얽혀있다. 애프터 마켓에서도 공식 굿즈는 물론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


이 모든 것들을 지금 모습의 하이 패션 시작 즈음에서 가늠해 볼 수 있다. 카니예 웨스트는 그냥 콘서트장 앞에서 기념으로 구입하는 물품 정도였던 티셔츠와 모자를 버질 아블로가 디자인한 머천다이즈로 팔기 시작했다. 그게 2002년의 일이다. 


이런 패턴을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끌고 갈 수 있는 브랜드들이 이 신을 주도하고 있다. 세대가 바뀌고 있는 문제라 이제 과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아무튼 이건 좋다 나쁘다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유케텐의 모카신이나 필슨의 울 매키너보다 노스 페이스의 고어텍스 마운틴 혹은 언디피티드 나이키 콜라보 스니커즈가 더 비싼 걸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또한 왜 아크테릭스보다 비싸게 노스페이스를 사는 지 이해 못할 수도 있고 왜 유니클로에 다 있는 걸 딴데서 사는 지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애초에 설득과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약간 재미있는 점은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는 와중에 내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가 나를 드러낸다는 생각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무엇을 입음은 하이 패션 신에서 로고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링크)를 살짝 참고. 그리고 자라 코트를 입고 부자처럼 보이는 방법, 혹은 부자처럼 보이는 자라 코트 같은 이야기는 지금 시대에 전혀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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