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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대로 입기, 청유와 결심

by macrostar 2018.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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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가 맘대로 입고 다니는 데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 없더라, 여러분도 그렇게 입어라"와 "나는 이제 마음대로 입고 다니겠다"는 다르다. 물론 앞은 청유고 뒤는 결심이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거 말고도 이 둘 간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



우선 후자의 상황을 예상해 보면 사회적으로 마음대로 입고 다니지 못한다 -> 극복할 거다가 있다. 또는 사회적 압박이 크진 않지만 내면의 규율이나 트렌드에 종속 같은 경우도 있다. 내면의 규율은 은근한 사회적 압박의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둘은 연결이 되기도 하지만 완전 연결되는 건 아니다. 어쨌든 양쪽 다 그렇지 못한 상황이고 그러므로 결심을 했다. 맘대로 입어도 되는 사회, 여건에서 저런 결심을 할 일이라고는 혼자 세워놓은 거대한 룰에 종속되어 있는 경우 밖에 없다. 사실 혹시나 이런 상황이라면 이분은 옷이 문제가 아닌 거 같다.


후자도 복잡하지만 전자는 조금 더 복잡하다. 굉장히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우선 사회적 압박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저런 이야기가 나올 이유가 별로 없다. 유행에 너무 민감한 사회인 경우도 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하나는 점잖게, 하나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입어야 하지 않겠냐는 압박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사실 이 청유는 기본이 잘못되었는데 애초에 너는 왜 맘대로 입고 다니지 않는 거냐를 해명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대로 입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너는 왜 그렇게 불편한 혹은 비싼 걸 입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줄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마음대로 입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권력일 수도 있고, 지위일 수도 있다. 또는 어차피 들을 생각이 없는(혹은 들어도 모르는) 경우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튼튼하지만 옷 외에 다른 일을 함께 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권력이나 지위는 날 때부터 있는 걸 수도 있고 자기가 올라간 걸 수도 있다. 예컨대 삼성의 이 부회장 뭘 입고 회사에 가든 사실 뭐라 할 사람은 가족 정도 밖에 없을 거다. 속으로는 궁시렁거릴 수 있을테고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야지...는 대부분 불가능하다. 옷 입는 거로 뭐라 듣는 사람들은 어릴 수록, 여성일 수록 커진다. 특히 뉴스나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를 보면 알겠지만 여성의 경우 나이나 지위에 무관하게 동 상황의 남성에 비해 의복 고나리가 매우 크다. 


이외에 환경이나 생태의 문제에서의 접근일 수도 있다. 그런 걸 입으면 세상을 더 덥게 만들고 태풍은 더 강력해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단다. 맞는 말이다. 이건 그런 생각을 안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권유는 지식의 전달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더라"는 어떤 줄기를 생각해 봐도 특수한 경우다. 그러므로 크게 의미있는 즉 누구나 할 수 있는 청유는 아니다.


물론 저 말을 듣고 반항과 항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순 있다. 사실 "멋대로 입는다"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매우 많다. 이걸 떠나서도 매일 입는 옷이라는 물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하게 접근해 본 경험이 없다. 구색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한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런 문장이 내면의 뭔가를 건들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사실 저런 문장이 건든 내면이 과연 무엇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약간 재밌다고 생각하는 점은 조금 다른 면에 있는데 예컨대 포멀 웨어는 룰이다. 하지만 여기에 포멀 웨어가 제대로 정착된 적이 있었나? 단언컨대 없다. 즉 사회적으로 압박을 하고 있는 의복의 룰 자체가 이미 굉장히 임의적이다. 멋대로 만들어졌고 체계도 별로 없다. 정말로 포멀하게 갖춰 입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게 보일 가능성이 있다. 이 임의적이고 대충 형성되어 있는 룰은 하지만 이 사회의 경직적 습성과 결합해 상당히 강력하다. 결국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상하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맨 앞으로 돌아가면 저런 청유는 화자가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안경을 썼더니 항의 전화가 오더라. 안경을 썼더니 상사가 눈치를 주더라. 안경을 썼더니 뉴스에 나오더라. 이게 지금의 진행 상황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타고니아 신칠라를 입고 스튜디오 뉴스를 진행하는 사회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뉴스 진행자가 뭘 입고 있는지 누구도 끝날 때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게 떠들고 있는 방향이긴 한데 물론 매우 이상적이다. 그러므로 실천하고 바꿔가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집중 조명을 하는 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어서 칼럼(링크)에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늘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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