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즐거움2017.01.01 01:28

중고 옷을 구입하다 보면 가끔 어떤 과거와 마주치게 된다. 예컨대 옷 자체가 말하는 것들이 있다. 주름이 남지 않고 빛이 바래가는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계열은 짐작이 어렵지만 코튼, 데님, 가죽 같은 것들은 꽤 충실하게 흔적을 남긴다. 처음 옷을 구입해 들고 와서는 종종 그런 걸 생각해 보곤 하는데 물론 대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 여기에 남겼던 중고로 구입한 드님의 66 모델의 경우(링크) 내가 내린 결론은 거의 입지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세탁은 했다... 정도다. 어떠한 장착이나 움직임의 흔적도 없이 리지드에서 균일하게 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거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바지는 그 외에도 이상한 부분이 좀 있었는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여튼 지금은 내가 입으면서 만들어진 흔적들이 남기 시작했다. 바지의 경우 다리가 휘었기 때문에 무릎 부분이 이상하게 탈색 되는 게 특징이다... ㅜㅜ


가끔 물리적인 증거물들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메모, 찢어진 신문, 영수증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극히 단편적이라 예상을 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데 저번 달에 구입한 옷 하나에는 꽤 구체적인 루트를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보통 중고 옷을 구입한 경우 나름의 의식(...이랄까 꽤 철저한 세탁,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철저하게 옷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각인 등등)을 거치면서 금방 버리는 데 이건 언제 좀 찾아봐야지... 하면서 던져 놨었다. 이참에 한 번 써 본다.



지하철 표 하나와 영수증이 나왔는데 모두 2013년 11월 17일이다. 지하철이 먼저고 편의점은 그 다음. 찾아봤더니 그날 오사카는 조금 흐렸고 최저 기온 9도 최고 기온 19도였다. 11월 중순인데 오사카는 역시 따뜻하군... 밤 11시 쯤이니 아마도 10도 초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분은 2013년 11월 17일(일요일이었다) 밤 10시 50분에 오사카의 미나미카타(南方) 역에서 한큐 급행을 탔다.



표는 그냥 180엔 구간이라 도착지가 나와있지 않은데 편의점 영수증으로 카미 신조(上新庄駅)역에서 내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역간 걸리는 시간은 7분 정도다. 그러니 11시 되기 좀 전에 내렸겠지. 여튼 이 역에서 나와 북부 출구 쪽에 있는 데일리 야마자키라는 편의점에 들렀다.



이 편의점은 물론 지금도 있다. 3년 밖에 안 지났으니까... 여기에서 매운 치킨 90g과 컵 누들을 하나씩, 시푸드 누들을 2개 구입했다. 11시 12분에 결제했으니까 뭐 들어가서 금방 골라 구입한 듯 하다. 뭔가 음식 취향이 한국인 여행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밤 11시가 넘어 컵라면을 세 개나 샀다는 점은 그냥 평범한 일상인 패턴이기도 하다. 


여튼 이 분은 저 음식을 구입한 다음 아마도 근처에 있는 집에 들어갔을테고  입고 있던 이 옷을 벗어놓고 편의점에서 사온 걸 먹었겠지. 구매 내역을 봤을 때 야식을 했다면 매운 치킨과 시푸드 누들을 먹었을 거 같다. 그러면 컵 누들과 시푸드 누들이 하나씩 남지... 그런 이후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부산에 있는 모 매장에 들어갔고 또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쳐 지금 내 방에 와 있다. 내가 2016년 11월에 구입했으니 딱 3년 만에 여기까지 온 거다.


옷은 디테일 쪽으로 봤을 때 2013년 생산분이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이 회사의 옷에 2013년에 바뀐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그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옷의 상태를 봤을 때 입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일주일에 세네 번씩 입었다면 한 달 정도? 


그렇다면 늦여름이나 초가을 쯤에 이 옷을 구입했다가 무슨 사정상,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다가 2013년 11월 17일의 밤 10도 초반의 살짝 쌀쌀한 쾌적한 날씨에 18일로 넘어가는 0시가 다 되어갈 쯤 저 매운 치킨과 시푸드 누들을 먹으면서 그래 이 옷은 역시 처분을 하자라고 결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옷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90그램의 매운 치킨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뭐 이쯤 생각해 보며 놀았으니 이제 저 표와 영수증은 버리는 걸로. 




Posted by macro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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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든

    빈티지를 사면 저도 꼭 주머니를 확인하는데 이번에 새로 산 오버롤엔 많이 바랜 일본어 메모가 있더라구요. 그것만으로도 재밌었는데 이런 영수증이 나온다면 정말 재밌을 거 같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주머니를 뒤져봐야겠습니다

    2017.01.01 01: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고 생각해 보는 거 꽤 소소한 즐거움이죠~ 저도 재밌었네요 ㅎㅎ

      2017.01.01 02:07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