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세가 복잡다망한 와중에(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는 게 별 의미가 없을 지경이다) 금값은 치솟고, AI의 발전은 없던 걱정을 더하고, 사회 대변혁의 모멘텀이 다가온다는 데 그 이후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2026년 루이 비통과 디올의 남성복 패션쇼는 흥청망청하기 그지 없다. 부의 과시, 그들만의 리그라는 패션 본연의 임무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이런 번쩍거림을 보고 있자니 1973년에 있었던 베르사이유의 배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넷플릭스 드라마 홀스톤에도 자세히 나온다고 하니 그걸 보신 분들도 있겠고...
참고로 1973년 10월 4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면서 석유 파동이 시작되었고 석유 감산은 1974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지하던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은 경제 피해가 꽤 컸고 아랍권을 지지하던 프랑스, 서독, 일본, 한국 같은 나라는 수혜를 꽤 입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인 1973년 11월 28일에 베르사이유의 패션 대결이 열렸다.
1943년에 뉴욕 패션위크를 만들고 1962년에 CFDA를 설립했던 엘리너 램버트는 1973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랑스 디자이너 vs. 미국 디자이너의 대결 컬렉션을 기획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브 생 로랑, 위베르 드 지방시, 피에르 가르댕, 크리스찬 디올, 엠마뉴엘 웅가로, 마크 보한이 나왔고 미국에서는 오스카 드 라 렌타, 빌 브라스, 앤 클라인, 홀스턴, 스티븐 버로우즈가 나왔다. 앤 클라인의 어시스턴트로 도나 카렌도 참여했다.
보다시피 프랑스 쪽에서는 오트쿠튀르 디자이너들이었고 미국 디자이너들을 스포츠웨어 쯤 만드는 이들로 인식했다고 한다. 프랑스 쪽은 각각 당시 3만 달러에 달하는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지만 미국 디자이너들은 비좁은 방을 배정받았고 리허설 시간도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독점했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유일한 여성 디자이너였던 앤 클라인은 추운 지하방으로 쫓겨나 쇼를 준비했다고 한다. 도나 카렌에 따르면 "여성으로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는 당시는 미국 디자이너들이 프랑스에 돈을 지불하며 카피의 권리를 사오던 시대였고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을 한다는 건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주목할 만한 분위기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프랑스 디자이너는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흥청망청의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다. 하지만 미국 디자이너들은 일단 36명의 모델 중 11명을 흑인 모델을 기용했고,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 모델도 있었다. 다양성과 함께 편안히 입을 수 있는 옷차림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은 디스코와 브로드웨이가 결합된 자유로운 워킹을 선보였고 이는 관례대로 움직이던 프랑스 패션과 대비를 만들었다.
대결은 미국 패션이 파리를 강타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물론 지금 입장에서는 편안히 입을 수 있다는 미국의 패션도 거추장스럽기 그지없게 보이지만 도나 카렌은 인터뷰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옷에 완전히 충격을 받았죠. '옷에 고리나 단추가 없다고? 그냥 쓱 걸치면 된다고?'라고 말했어요. 미국인들은 정말 앞서 나갔던 거예요. 낮부터 밤까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차림이 핵심이었죠. 앤은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잡지에서는 프랑스 디자인은 딱딱하고 구식으로 느껴지는 반면 미국 디자인은 디스코 시대의 활력과 자유로운 여성을 표현했다고 적었다.
잘 구조화된 생활감과 활력은 끝 간데 없는 흥청망청을 유치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건 끊임없이 반복된다. 질 샌더가 등장했을 때, 헬무트 랑이 등장했을 때 이전에 쌓여 있던 흥청거리는 그들만의 패션은 순식간에 촌스러운 옛날 물건들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저걸 입고 어디서 뭘하라는 걸까"를 생각하게 될 때 결국 패션이란 입고 어딘가 가야 하는 옷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본질에 다시 접근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패션은 겉을 꾸미는 일을 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옷을 입는 사람과 태도에 대한 일이다.
물론 이런 변화들은 시대의 필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는 과연 평범한 이들이 입을 델리킷한 옷이 필요할까. 혹시나 그런게 필요하다면 저 번쩍거림을 과거의 유물로 밀어낼 디자이너는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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