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서는 작은 즐거움들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작은 즐거움은 옷을 입는 방식, 옷을 입는 모습, 옷에 대한 자신의 만족, 옷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 옷의 디테일 등에서 나온다. 작은 즐거움의 다른 형태인 사람들이 함께 일상의 일을 하며 느끼는 커뮤니티적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즉 패션의 작은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생각해 보면 현대적 개인주의의 맥시멈한 자리에 패션이라는 분야는 위치하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 자기 만족, 남들이 뭐라든의 세상이다.
하지만 패션은 또한 시그널의 역할을 한다. 보여지는 거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보게 된다. 남이 뭘 입었든, 어떻게 생겼든, 뭘 하고 있든 자연스럽게 스루해 버리는 능력은 현대인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잘 안되거나, 스몰 토크가 없으면 세상이 잘못된 거라고 믿거나 하는 등의 사람도 있고, (현대) 문화도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는 소통에 기여한다. 다만 오독의 여지가 아주 높은 영역이기 때문에 분위기, 자신의 인상 같은 걸 믿으면 낭패를 볼 가능성이 높다. I와 E, S와 N 같은 알파벳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과 생각과 삶이 있다.
아무튼 패션은 궁극적으로 함께 하는 즐거움이 아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깊으신 분들 중 자꾸 이거 가지고 뭘 해보자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디까지나 침소봉대의 해석이다. 점유하는 부분은 극히 작다. 뭔가 만들거나, 고치거나 하는 쪽이라면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패션이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 만들거나, 고치는 일이라서 그렇다. 함께 밭을 갈거나, 청소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타인과 함께 할 정이 넘치는 요소는 아예 찾지 않는 게 좋다. 다만 아주 가끔 시그널에 응답이 오는 때가 있다. 뜻이 통했나 보다.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종자기가 나타난 듯한 일이지만 일단은 패션 만의 영역이다. 이렇게 보면 울타리를 두르되 어디엔가 문 정도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나 싶다. 문이란 들어올 때도 쓸 수 있지만 도망갈 때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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