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이미지와 이야기 위에 얽혀 있다. 거의 똑같게 생기고 제작의 방식도 다를 게 없는 후디나 티셔츠는 프라다의 세계, JW 앤더슨의 세계, 루이 비통의 세계 위에서 다르게 작동한다. 또한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패션쇼에서 혹은 광고 캠페인을 통해 그걸 넌지시 드러낸다. 어디까지나 넌지시다. 스토리가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는 건 또 뭔가 멋지지가 않고 없어보인다. 그럴 듯 하게, 뭔가가 있는 듯 정도로 충분하다.
이 이야기가 통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로고만으로도 연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찌의 티셔츠와 유니클로의 티셔츠는 다른 제품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깔려 있는 이야기들이 그다지 솔깃하지 않는 순간 이 구별은 의미를 잃는다. 즉 패션은 일단 스토리 바깥, 이미지 바깥에서 자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로고만 다른 코튼 후디는 그러므로 자기 파괴적이다. 자생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대부분의 고급 브랜드는 다른 것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에 만들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별은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빈티지를 찾는다. 그게 더 낫기 때문에, 잘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없는 뭔가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레어함 자체가 유인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레어함이 그걸 멋지게 만들고 지금 세상의 패셔너블이라는 콘텍스트 위에서 기능을 한다. 이 역시 패션이 인스턴트해지고 있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패션은 붕괴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아마도 그러진 않을 거다. 연예인, 유명인, 패셔니스타 등등은 구별의 시그널이 필요하고 패션은 이런 시그널을 만드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장벽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임금님의 투명 옷과 다를 게 없다. 유명한 이유가 유명해서고, 비싼 이유는 비싸서 같은 뱀 꼬리 물기 같은 순환을 서로 정해놓고 강화하고 서로서로 형식적인 감탄사를 내뱉게 될 뿐이다. 올, 그거 입었냐. 이래서는 패션에서 재미있는 게 나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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