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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패션과 착장 사이의 임의적 구분

by macrostar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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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장은 규칙의 준수 정도를 기준으로 봤을 때

 

아주 갖춰진 옷

약간 갖춰진 옷

약간 편안한 옷

아주 편안한 옷

 

이렇게 4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아주 갖춰진 옷은 포멀웨어, 약간 갖춰진 옷은 비즈니스웨어, 약간 편안한 옷은 캐주얼웨어, 아주 편안한 옷은 트레이닝 복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곳 사이트에서도 자주 이야기하고 책으로도 낸 적이 있는 일상복(링크)이란 적어도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입는 옷을 말하기 때문에 약간 갖춰진 옷과 약간 편안한 옷을 아우르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the gazette of fashion, 1872

 

참고로 이런 구분은 점점 유연해지고 있다. 아주 갖춰진 옷으로 턱시도와 드레스 같은 포멀 웨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옷을 입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국제 영화 시상식 같은 자리에 데님으로 만든 셋업을 입거나 드레스에 스니커즈를 신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기존 규칙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비즈니스웨어까지는 착장의 규칙이 다소 엄격하게 적용되는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오피스 직종의 다양화, 불필요한 규칙에 대한 실용적 접근 추세 등으로 규칙 자체가 느슨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약간 편안한 옷에 해당하는 캐주얼의류도 스마트캐주얼이라는 이름으로 약간 갖춰진 옷 계열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구분은 상대적이라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스마트 캐주얼을 입다가 공식적인 미팅 자리 등에서는 비즈니스웨어를 입는 식으로 대응을 한다.

 

이러한 변화는 착장에 있어서 형식의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고 편안함과 실용성이 중요시되는 방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위에서 말한 단계는 흔적이 남아있고 쉽게 어기기 어려운 장소와 상황도 있다. 저항에는 에너지가 소모되고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낡은 규율의 파괴면 경우면 몰라도 당장은 그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워크웨어도 들어설 자리가 많아졌다.

 

패션은 위에서 말한 착장 규칙의 단계와 별개로 존재한다. 여기는 3단계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아주 패셔너블함

약간 패셔너블함

완전히 무시

 

아주 패셔너블함은 디자이너 브랜드나 주요 패션위크 등에서 볼 수 있는 레벨, 적당히 패셔너블함은 여기서 파생된 트렌디한 디자인을 가미한 옷들, 그리고 완전히 무시 정도의 단계다. 주의할 건 옷을 보면 대강 눈치챌 수 있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패션은 어디까지나 만든 쪽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산자의 패션은 일종의 선언이자 주장이다.

 

예전에는 아주 갖춰진 옷이 패션의 대상이었다. 그외에는 상류층의 옷을 기준으로 더 저렴한 소재와 더 간단하고 편안한 디자인으로 모사한 옷을 입었는데 대부분 옷에 쓸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 디자인이고 뭐고 그냥 구해 입을 수만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다가 중산층의 경제적 안정 속에서 패션의 폭이 아래로 넓어졌다. 테일러드 재킷과 셔츠, 투피스 셋업과 구두 같은 옷이 고급 브랜드나 기성품, 패스트 패션으로도 나오게 되고 복장의 규칙 사이에서 취향을 반영하고 개성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패션과 관련된 하위 문화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주 편안한 옷 쪽에서 시작해 패션을 점유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21세기 초반 패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스트리트 패션은 약간 편안한 옷, 아주 편안한 옷 단계인 사병의 밀리터리 유니폼이나 스포츠웨어, 아웃도어웨어를 기반으로 시작해 아주 갖춰진 옷이 점유하던 영역까지 진입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즉 패션은 초기에는 패션 디자이너 같은 생산자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비자가 구매한 재화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일도 패션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최근의 패션은 소비자의 태도와 보는 사람의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이 경우는 생산자의 의지는 무시될 수 있다. 당장 버려져야 할 것 같은 누더기 같은 옷도 패션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한 멋진 옷이 수많은 대체품들과 함께 평범하게 소진될 수도 있다. 생산자가 이게 패션이라고 옷을 만들었든 말든 상관이 없다.

 

Junya Watanabe + Carhartt, 2018 SS

 

위에서 말한 착장 4단계의 옷과 패션 3단계는 모두 패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워크웨어도 마찬가지다. 생산자가 워크웨어에 디자인 요소를 첨가해 패션으로 만들 수 있다. 또 생산자가 작업할 때 입으라고 만들어 놓은 옷을 그대로 소비자가 패션으로 소비할 수도 있다. 디자인 요소가 첨가된 패셔너블한 워크웨어를 실제 작업용으로 입을 수도 있다. 준야 와타나베와 칼하트의 협업으로 나온 워크 재킷을 패션에 관심 많은 농부가 입고 농장일을 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돈이 조금 더 들 뿐이다.

 

심지어 자신은 딱히 패션으로 의식하지 않고 패션에 반항을 하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그걸 패션으로 여길 수도 있다. 패션에 대한 무심함마저 패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걸 상품으로 만들어 비싸게 팔 수도 있는 게 현대의 패션 산업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패션은 사회적 관계 속의 임의적 산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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