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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너블함의 정도

by macrostar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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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정도는 바른 도리, 정벌하러 가는 길 이런 게 아니라 분량을 말하다. 패션은 기본적으로 폼을 잡는 거라 생각한다. 이 말은 멋나게 보이는 것, 예쁘게 보이는 것 등등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거의 다 비슷한 의미다. 이 폼을 잡는 것이라는 말은 하지만 정의가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뭐가 폼이 나게 보이는 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모습에서 폼이 난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에서 폼을 내는 조악함을 같잖게 생각하며 또한 아예 남과 비슷하게 군중에 파묻히는 걸 폼이 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돌리고 돌리고 하며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완성도의 세계도 아니고 유니크함의 세계도 아니다. 판단의 몫은 그 사람의 주변에 주어지게 되는데 우선 주변이 전체를 반영할 수 없다. 레벨의 문제와도 조금 다르다. 어쩌다 주어진, 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거 같다. 이렇게 나가다 보면 결국 패션은 태도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데 태도는 패션에 반영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반영이 된다해도 알아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건 인생사의 문제고 옷은 모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해 파타고니아를 입는다고 환경 운동가가 아니겠지만 환경운동가 중 일부의 태도는 파타고니아를 입게 만들 수가 있다. 이 관계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브룩스 브라더스 룩북

 

그렇다고 완전히 기준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어디에나 실험은 있다. 그 실험의 정도가 부족하면 뒤쳐진 듯한 느낌에 빠지고 정도가 지나치면 인싸템의 바운더리 바깥이 된다. 이 경계선은 아주 미묘한데 예컨대 무한도전 같은 공중파 예능 방송에서 보이는 정도의 실험이 받아들여지는 한계선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예능 방송에 누군가 이리스 반 하펜의 옷을 입고 나온다면 지나친 농담을 위해서거나 또는 그게 누군지 알려주기 위해서 일 가능성이 크다. 일상복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역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패셔너블함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리스 반 하펜은 농담을 하는 게 아닐까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그분은 정말 패션에 대해 진지한 걸까.

 

 

카피탈의 룩북

 

따지고 보면 이 기준점은 아주 많은 부분이 경험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 기준점이 보고 들은 것과는 약간 다르게 형성된다. 쇼핑이 보통 그렇듯 오후 4시까지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옷을 5시에 만나고나면 저 옷을 사서 입고 다니면 세상이 훨씬 즐거워질 거 같고 자신이 더 폼날 거 같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즉 이것은 이러이러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이런 소재로 이러저러하게 만든 옷이 필요하고 그걸 찾아본다 같은 점증적 결론으로 가는 게 아니다. 모르던 걸 만나게 되고 그걸로 방향이 조금씩 바뀐다. 모르던 걸 만나게 되는 건 환경이 좌우한다. 근처의 사람들이 입는 옷, 주변의 지인들이 입는 옷 그런 게 없다면 혼자 부지런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만난 옷이 그런 방향을 만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이유로 기준점은 언제나 변하고 점점 더 불분명해질 수 밖에 없다. 아마도 문제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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