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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인스턴트한 소비 패턴, 경년변화의 설계

by macrostar 201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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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인스턴트한 패션 소비를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 최근의 일이 몇 가지 있는데 1) 구겨지면 버리지 말고 다려서 쓰라는 스팀 다리미 선전, 구겨지면 옷을 버리는 사람도 있나? 이건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그저 상상력으로 만들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 않나 2) ABC 마트 리뷰에 운동화가 마음에 든다고 4개월은 잘 쓸 수 있겠다는 이야기, 척 테일러였는지 코투였는지 기억은 잘 안나는 데 아무튼 운동화를 4개월 신나?

 

아무튼 둘 다 상상력의 범위 안에 있지도 않던 것들이라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라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조금 덧붙이자면 구겨지면 버려야 할 만한 건 가죽은 그렇지 않을까 싶긴 한데 그건 스팀 다리미를 쓰면 안된다. 가죽에 습기는 천적이기 때문에. 하지만 구두 관리 스레드 같은 외국 포럼을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소는 비 안 맞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더러워진 작업 부츠를 물로 씻어낸 다음 구두약을 칠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살아있는 동물의 피부와 구두에 쓰는 가죽은 물론 엄연히 다르긴 하다. 전투화를 저런 식으로 닦은 적이 있는데(정확히는 물로 씻어낼 수 밖에 없는) 물론 당장 못 쓰게 되지는 않는다. 뻑뻑하다가 약 칠하고 조금 쓰다보면 꽤나 멀쩡해 짐. 글쎄... 10년 쓸 수 있는 걸 5년으로 단축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지금 하려는 건 이 이야기가 아니라... 경년변화, 페이딩, 파티나 같은 건 대체적으로 몸에 닿는 부분이 재미있는데 동작이 만드는 마찰 등에 반응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동작이 조금씩은 다르기 때문에 말 그대로 개인화된다. 예를 들어 신발 밑창이 닳는 경과는 다들 다른데 허리 상태, 걸음걸이, 환경, 습관, 자세 등 많은 부분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밑창은 소모품이라 경년변화의 대상이 되기가 어렵다. 대신 건강의 바로미터, 앞으로 생활 습관을 고쳐야 할 부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포터 가방 사이트를 보면 가방 부자재, 금속, 표면의 닳음을 경년변화, 에이징이라고 지칭하고 그걸 즐겨보자는 이야기를 꽤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가방은 일단 몸에 닿지는 않기 때문에 마찰이 경향이 개인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고 그렇다면 과연 이게 개인화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걸까 매번 의문을 가진다. 물론 맨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그렇게 까지들 쓰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가방 지퍼 고리의 코팅이 벗겨졌으면 버리지 말고 새로 칠하세요... 같은 광고가 있다면 그건 또 괜찮지 않나 싶다.

 

포터 사이트에 나와 있는 에이징의 예시. 여기(링크)를 참고.

 

예전에 UES 모자 이야기를 할 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북토크였던가?) 요새는 에이징을 "설계"하기도 한다. 변색이 진행되도록 유도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목격할 수 있게 하는 거다.

 

UES 데님 캡을 보면 안이 체크 무늬 천으로 되어 있어서 4, 5년 정도 열심히 쓰면 저렇게 무늬가 드러난다. 사실 저 부분이 뜯어지려면 굉장히 오래 써야 한다. 그리고 이런 대놓고 설계는 초창기 타입이고 웨어하우스나 풀카운트의 최근 에이징 설계를 보면 훨씬 세세한 디테일에 집중하고 있다. 

 

위 포터의 경우 설명을 보면 저 금속은 "일부러" 잘 벗겨지기 쉬운 회색 도장을 해놨고 사용해 가면 금세 위 사진처럼 희끗희끗한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즉 코팅 속 금속 색깔도 맞춰서 세팅해 놓은 거다. "일부러"라는 게 좀 미묘한데 사실 도장 같은 건 일부러 잘 벗겨지지 않게 해놔도 언젠가는 벗겨지게 되어 있다.

 

유니클로의 라이프웨어처럼 얇게 혼방으로 만드는 걸 편안함으로 선전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꼭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게 분명 더 편하기 때문이다. 대신 수명이 짧은데 그걸 장점으로 여길 지는 단점으로 여기는 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헤비 코튼 티셔츠는 분명 훨씬 수명이 긴데 그만큼 덥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은 여름 날씨에는 그런 차이가 매우 크다. 포터의 금속 코팅도 물론 더 오래 가게 할 수 있을텐데 일부러 저래 놓은 거에 장단점이 있을테고 저게 좋아서 사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 같다.

 

집에 있는 가방의 경우 검정 코팅이 벗겨지면서 황색 구리풍 금속 색이 드러나고 있다. 굳이 새까맣게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인드는 그게 불호인 경우 역시 생각의 전환과 익숙해지는 훈련이 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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