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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과연 뚜르비옹 시계의 본질인가

by macrostar 2015.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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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면 물론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다.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계를 사용하고 시계를 본다. 오직 그것만 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라 이제 와서는 효용이 많이 떨어졌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렇다면 고급 시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론 마찬가지로 시간을 알려주는 거다. 하지만 시간을 알려주기만 하는 기계 치고는 너무 비싸다. 예컨대 태그호이어의 비로스 사장은 우리가 파는 건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아니라 이미지다라는 말을 했었다. 



스티브 맥퀸, 태그호이어의 모나코 크로노그래피. 자동차 경주를 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도록 시계가 필요한 거라면 저거보다 지샥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스티브 맥퀸이 지샥이나 돌핀을 차면 기분이 안 좋아져서 경기력이 떨어질 수는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몸에 붙어 있을 때 컨디션의 영향을 받는 경우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므로 제 몸에 닿는 건 가능한 제 맘에 드는 걸로...


여기서 한 칸 더 나아가 오토매틱 시계가 있고 뚜르비옹 시계라는 게 있다. 시간을 알려면 디지털이 제일 확실하고 고장도 잘 안나고 정확하다. 디지털 숫자판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폼이 너무 안 난다라고 생각하면 쿼츠 모델들이 있다. 초침과 분침이 있고 건전지만 넣어주면 째깍째깍 돌아간다. 오토매틱은 약간 다른 세계다. 이건 두 개의 본질이 있는데 하나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 또 하나는 톱니의 정교함이다. 그 비싼 시계를 구입하는 이유는 시간을 알려는 목적 뿐만 아니라 정밀 기술의 이미지 그리고 정밀한 기술을 손목에 가지고 있기 위해서다. 뚜르비옹은 거기서 더 나아가 초고도의 정밀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과연 시간을 알려고 이런 시계를 사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회의적이다. 저 정도 시계를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비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언제든 물어보면 시간을 알려주는 비서를 한 명 고용하는 게 더 저렴할 수도 있다. 그 임무만 가지고 한 달에 100만원 씩 줘도 10년에 1억 2천, 아래에 나올 시계보다 저렴하다. 물론 시계 장인이 몇 백 개의 톱니를 깎은 이유는 아무튼 시간을 알려주기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긴 하다. 그렇지만 발상을 전환하는 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할디만(Haldimann)의 H3 Flying Sculpture with Minuterepeater라는 시계가 있다.



전통을 가진 스위스의 뚜르비옹 시계 메이커답게 이 시계는 H.Zen-C manufacture calibre라는 고성능 무브먼트를 달고 있다. 하지만 보다시피 시간을 알려주는 시침과 분침 따위는 없다. 오직 1분이 지나갔다는 것만 알려준다는 데 영상이 없어 어떤 방식인지 확인을 못했다.



그리고 H3의 이름에서 Minuterepeater를 뺀 H8이라는 시계가 있다. 이건 그냥 H8 Flying Sculpture다.



보다시피 H3과 H8은 같은 모습이다. 다만 H8은 분이 지나감도 알려주지도 않는다. 단지 톱니가 돌아가는 모습만 볼 수 있다. H3과 같은 무브먼트를 사용했는데 제조사의 말과 같이 이건 시계라기 보다는 정밀하고 움직이는 조각에 가깝다. 하지만 시계용 무브먼트니까 시분침을 달아 시간도 알려 줄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그게 H1이다. 



바젤 월드 2010에 나온 이 시계들에 대한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할디만은 여기에서 한 칸 더 나아가 H9라는 시계를 내놨다. H8은 무브먼트가 돌아가는 모습이라도 멍하니 볼 수 있었는데 H9 Reduction은 아예 앞 유리에 검은 칠을 해 가려버렸다.



아래 사진에서 왼쪽은 H8이고 오른쪽이 H9다. 보다시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거면 아예 스테인레스로 덮어버리지 왜 검게 칠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적어도 시계의 관용적인 원래 형태는 따라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튼 아마도 쉼없이 째깍째깍하는 무브먼트가 돌아가는 소리 정도를 들을 수 있을 거다. 다만 오토매틱이 아니라 태엽을 감아야 하는 시계이기 때문에 팔이 움직일 때 태엽을 감으며 생기는 윙윙 거리는 진동은 느낄 수 없을 거 같다. 


이런 시계가 있다는 걸 처음 봤을 때 과연 이 정밀 기계가 제대로 돌아가는 지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뭐 이쪽에 워낙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일정한 간격으로 톱니가 움직이는 소리만 가지고도 이상 여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자동차 엔진음을 들으며 뭔가 이상한 점을 감지하는 것과 비슷한 식으로 말이다.


할디만은 스위스에서도 가장 오래된 가족 기반 시계 제조업체 중 하나로 연혁으로 따지면 1374년에 카운실에 등록을 했다(링크). 어차피 매장가서 돈 내고 덥썩 들고 오는 류의 제품은 아니기 때문에 혹시나 구입의 생각이 있다면 위 링크의 홈페이지에서 컨택을 하면 될 거 같다. 여하튼 H3에서 H9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전반적으로 땡깡을 부리고 있다... 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데 이런 비싼 장난이 뚜르비옹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 만들어지는 이유, 또 구입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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