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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뎀나 즈바살리아가 패션을 망쳐놓고 있다

by macrostar 2017.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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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제목과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십 몇 년 쯤 전에 톰 포드가 패션을 망쳐 놓는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이글루스 시절이었고 이 사이트를 만들면서 그걸 여기에 가져와 처음 글로 올렸다. 그러므로 헬로 월드를 제외하고 여기의 첫 번째 글이다(링크). 그때 패션을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쓴 이유는 고급 의류가 귀족의 워드로브를 지나 80, 90년대 들어 확대되는 개인주의와 늘어난 소득, 팬덤의 소비 정도로도 버틸 수 있는 디자이너 등등 덕분에 고급 패션은 좀 더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만 보다 개인적인 활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제 좋은 걸 입고 다닐 수가 있었고 귀족이 아닌 이들이 구축하는 우아함 혹은 데리킷 같은 것들이 만들어질 기미가 찰나에 존재했다. 



하지만 톰 포드의 등장 이후 패션은 블록 버스터가 되었고 연예인 - 트렌드 세터의 줄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경제 위기도 본격화되었다. 트렌드가 커지고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의 소비의 여력이 줄어든다는 건 한 번 선택할 때 트렌디 한 걸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실패의 비용을 복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트렌드의 힘은 더 강해진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묘한 우아함 같은 걸로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이게 모두 톰 포드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거기에 제대로 부응한 거다.



두 번째로는 망쳤다는 표현이다. 톰 포드가 패션을 망친 게 아니라 세상이 패션을 망쳤고 톰 포드는 가속 페달이 되어 줬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또 망쳤다고 말할 것 까지야 있나 싶다. 어차피 하이 패션은 나와 관계가 없는 세상이 될 예정이었고 그 이후 차곡차곡 그렇게 흘러갔다. 작년에 쓴 책 패션 vs. 패션(링크)은 그렇게 패션이 멀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변했고, 그렇다면 적응하면 되고, 그래도 혹시나 옷이 재밌고 좋다면 그 안에서 새로운 취미를 가꿔가면 된다. 



지금의 제목은 이왕 예전에 썼던 비슷한 풍의 이야기가 있으니 그에 대응해 제목을 저렇게 썼다. 그리고 십 년이 조금 지난 시간이 흘렀다.




물론 고급 패션은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실용품이다. 하지만 이건 마치 이번 루이 비통 전시와 비슷하다(링크). 누군가가 썼던 그리고 쓰고 있을 가방을 전시장에서 "감상"한다. 전시의 마지막에 접어들면 가방을 만드는 장인을 볼 수 있고 그 다음 코너에서는 십 몇 만원짜리 네임 태그나 향수를 판매하고 있다. 하이 패션은 가격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세계 문화재 급으로 더 끌어 올리고자 하고 그러므로 최근 몇 년 간 패션 업체 주도로 자신을 주목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전시를 개최하며 자신의 전설을 직접 써내려 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하이 패션을 잠식해 들어가던 스트리트 패션은 힙합이 피크를 찍음과 함께 이제 하이 패션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러므로 여기에서 새로운 줄기가 만들어 진다. 예전에 셔츠나 재킷 가격 대에 티셔츠가 자리를 잡았고 스트리트 패션의 핵심이라 할 이 티셔츠(모자, 스니커즈, 청바지 등등 캐주얼 의류들)들은 다른 제대로 된 옷보다 낮은 가격이라는 허들로 그나마 쉽게 접근을 할 수 있게 만든다. 



티셔츠 사는 데 65만원이나 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링크) 구찌의 옷을 사는 데(게다가 누구나 알 만한 대 히트 아이템이다) 65만원만 들이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트리트 패션은 하이 패션 속에서 티셔츠와 후디라는 아주 괜찮은 문을 하나 제공해 줬고 이제 그 문을 통해 스타일이니 뭐니 하는 시행착오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지만 트렌드의 정점에 서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그게 어떤 건지 궁금한 이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취향, 라이프 패턴이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데 바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같은 것들이다. 예컨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새로운 구찌의 반짝임, 복잡한 컬러, 하지만 약간 물이 빠진 듯한 색감은(링크) 딱히 필터를 쓸 필요도 없이 인스타그램에 완벽하게 대응한다. 그리고 뎀나 즈바살리아가 있다. 종종 뉴스에서 페북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 인스타그램에서 하트를 받기 위해, 트위터에서 알티를 받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 건 장난을 치는 사람들을 본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한 번 웃기면 그걸로 된 거다는 어느덧 이 시대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고 그게 뎀나의 베트멍을 거쳐 발렌시아가로 들어갔다.






이번 발렌시아가의 남성복 패션쇼(링크)를 보며 새삼 다시 느끼지만 뎀나는 바로 그런 애티튜드를 그대로 패션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한 번 웃기기 위해 모든 걸 불태우고 그게 뭐든 별 상관이 없다. 그나마 베트멍이나 발렌시아가의 옷이 가지고 있는 농담의 좋은 점이라면 굳이 목숨을 걸거나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그저 돈만 좀 들이면 된다는 거다. 베트멍이 너무 비싸다면 또 베트멍가지고 농담을 하는 베트밈 같은 패러디 브랜드들도 잔뜩 있다(물론 그런 곳들도 갭보다는 비싸다). 이 하루 웃기고 보자는 패션은 인터넷이라는 바닥에서 시작되어 스트리트 패션의 유행을 타고 뎀나 즈바살리아가 제대로 핵심을 찝어낸 덕분에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하이 패션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한참 마리 카트란주나 프라다 등이 옷에 그림을 잔뜩 그리고 있을 때 그 트렌드가 완전 웃기다고 생각했는데(대체 옷에다 그림을 왜 그리는 걸까) 이건 그와 비할 바가 아니다. 훨씬 더 인스턴트하다. 예전에 톰 포드를 보며 이런 시덥잖은 유행은 금방 끝나겠지 했었는데 알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뎀나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보다 더 한 농담을 뭘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냐 이 시덥잖은 유행은 금방 끝나겠지 생각했지만 이번 남성복 패션쇼를 보니 역시 전혀 그렇지 않겠구나 싶다. 그리고 사실 망쳐 놓을 게 뭐 있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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