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테즈와 커세어
필 나이트는 오리건 대학교를 나와 현역으로 군에 복무한 후 스탠포드의 비즈니스 대학에 등록해 “일본 운동화가 독일 운동화에 미치는 영향은 일본 카메라가 독일 카메라에 미치는 영향과 같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의미는 결국 그가 고품질이지만 가격은 낮았던 일본의 운동화를 수입해 미국에 판매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1962년에 석사 학위를 딴 필 나이트는 세계 여행을 떠나고 고베에 갔다가 오니츠카의 타이거 브랜드 운동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오니츠카를 만나 미국 서부 지역의 유통권을 따낸다.
첫번째 샘플이 배송되기까지 1년이나 걸렸지만 받은 샘플을 오리건 대학의 트랙 코치 빌 보우만에게 보냈고 제품에 만족한 둘은 반씩 투자해 블루 리본 스포츠(BRS)라는 회사를 만들어 오니츠카 운동화 수입을 시작했다. 수입한 운동화는 아주 잘 팔렸고 그러는 사이 보우만은 코치로 도쿄 올림픽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는 오니츠카를 찾아가 더 부드러운 내부, 더 나은 아치 지지대, 아킬레스 건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힐 웨지 등이 필요하다는 피드백을 줬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오니츠카와 BRS 모두 멕시코 66모델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는데 이 성공을 이어가기 위한 운동화가 계획된다. 1967년 보우먼은 오니츠카의 스프링 업 모델 미드솔과 림버 업 모델 아웃솔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오니츠카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서 보냈다. 처음에는 이 모델의 이름을 아즈테카라고 했는데 아디다스에 이미 아즈테카 골드라는 모델이 있었다. 그래서 아즈텍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에서 가져온 코르테즈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이 운동화는 1969년에 미국 시장을 위한 전용 트레이닝 슈즈로 발매되었다.
1970년 오니츠카의 매출은 2200만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미국에서 나왔고 이는 BRS가 만들어 낸 성과에 기인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 필 나이트는 오니츠카와의 불완전한 관계보다는 직접 브랜드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고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알게 된 예술가 캐서린 데이비슨에게 새로운 로고를 의뢰해 스우시가 만들어진다.
1971년 오니츠카와 BRS의 협력비즈니스 관계는 완전히 깨지고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신발을 제작 판매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나이키의 첫 트랙화로 스우시가 붙어 있는 코르테즈가 1972년에 나오게 된다. 1974년 오니츠카와 신발의 이름을 두고 소송이 벌어지는데 나이키가 이겨서 코르테즈라는 이름을 계속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오니츠카 쪽은 오니츠카 타이거 커세어 라고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72년 나이키, 1977년 아식스라는 회사가 등장했고 이후 둘은 각자 다른 미래를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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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매거진 B 이슈 넘버 99 아식스를 참고해 주세요(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