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루이 비통과 비시 정권

macrostar 2017. 4. 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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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극우 정당 후보 마린 르펜이 나치 정권 치하에서의 유대인 학살에 프랑스의 책임은 없다고 발언해 문제가 되고 있다(링크). 기사에도 나와있지만 잘 알려진 사건으로 벨디브 사건이 있는데 1942년 비시 정권 하 프랑스 경찰이 유태인 1만 3천명을 검거해 벨로드롬 디베르(벨디브)라는 사이클 경기장에 수용한 후 나치에 넘겼고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이 뉴스를 보고 생각났는데 비시 정권은 루이 비통과도 약간 관련이 있었다. 10년 전쯤 스테파니 본비치니라는 분이 이 부분을 밝혔는데(링크) "재밌는" 건 비통에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문서가 "불에 타" 버려서 없다는 거다. 이 저자도 비시 정권 하 프랑스를 연구하다가 이런 대답을 듣고 뭔가 의심스러워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1942년 나치에 점령된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 루이 비통 매장이 보인다.


여튼 1940년 히틀러의 아르덴 숲 전투의 성공으로 파리가 함락된다. 이후 펠리프 페텡이 나치에 항복하고 비시에 새 정부를 새웠다. 당시 프랑스는 런던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비시의 Hotel de Parc가 페텡이 세운 정부의 중심가가 되었다.


당시 루이 비통은 아직 가족 경영 상태로 창업자 루이 비통의 손자인 가스통이 전쟁 중 브랜드를 이끌고 있었다. 그는 큰 아들인 앙리에게 전쟁 중에도 비지니스에 차질이 없게 비시 정부와 잘 협력하라는 임무를 맡긴다. 당시 파르크 호텔 주변의 부티크들은 영업을 중단했지만(기사에서는 반 크리프 & 아르펠을 예로 들었다) 루이 비통만 유일하게 영업을 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일로 나치 치하 프랑스 정부에서 최초로 훈장을 받은 사람이 되기도 했다. 뭐 이 정도까지는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비지니스를 하는 이들이 (독립 운동까지는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의 범위 안에 들기는 한다. 문제가 되는 건 페텡을 미화하기 위한 제품 공장을 만들었고 거기서 2500개의 흉상을 만들기도 했다는 거다. 이런 건 분명 적극적인 비시 정부 옹호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비시 정부가 계속 흘러가고 나치가 모든 걸 점령했다면 후일 톡톡히 덕을 보며 히틀러 흉상을 만들었을지도 모르지. 


당시 이 보도에 대해 LVMH 측에서는 이런 행동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건 옛날 일이고 예전 루이 비통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즉 가족 기업 루이 비통과 LVMH는 다른 회사라는 거다. 이런 건 르펜의 이야기와 꽤 비슷하긴 하다. 분명 둘은 다른 회사지만 그렇다면 since 1857은 뭐고 모노그램 프린트를 만든 건 누구고 여태 팔아먹으며 이득보고 있는 건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여튼 당시 프랑스의 유대인 쪽에서는 놀랍고 처음 밝혀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뭐 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라 이제와서 보이콧 이런 건 좀 이상하지 않냐 하지만 지금 그러면 가만 안 있겠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이런 과거가 있었다는 거 정도는 알고 있는게 좋을 거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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