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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의 즐거움

이상한 옷 시리즈 02

by macrostar 201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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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상한 옷 이야기다. 시리즈 01은 여기(링크), 화면 오른쪽 아래 TAG 모음에서 '이상한옷'을 눌러도 나온다. 사실 이상한 옷이라기보다 안 예쁘고 안 좋은 옷 이야기다.

 
오늘은 플리스다. 후드가 있고 짙은 초록색에 노란 줄이 포인트. 사이즈는 105로 꽤 크다. 잘 안 펴지는 데 사진은 그냥 찍었다. 후드에 끈이 달려있었는데(그건 주황색이었다) 사라졌다. 택에는 유씨 버클리 어쩌구 뭐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다. 택이 안 예쁘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

예전에 살던 집 아래에 옷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샀다. 겨울에 방에서 입으려고 하나에 5천원인가 2천원인가에 몇 벌 샀는데 다 사라지고 이것만 남았다.

옷 공장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소형 옷 공장은 대부분 주택가에 모여있다. 근처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나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들이 일하신다. 지나가면서 슬쩍 보는 거지만 할아버지는 못 본 거 같다.

가끔 이런 동네에 외제차가 나타나는데 대부분 오더를 주거나 하러 온 어딘가의 사람들이다. 딱히 통계를 낸 건 아니지만 희안하다고 생각했던 건 하나같이 BMW, 그것도 5 시리즈라는 거다. 특히 젊은 사람이면 틀림없다. 아우디도, 벤츠도, 폭스바겐도, 마쯔다도 본 기억이 없다. 내 필터링이 만들어 낸 왜곡된 통계일 수도 있으니 어디가서 옷 오다하러 온 사장들은 BMW 5시리즈만 탄대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그때 이런 게 개인사업자나 소규모 법인 사장의 입문 도구 같은 게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요즘 사는 근처에도 옷 공장들이 있는데(사실 옷 공장보다는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겠는 천을 만드는 곳이 많다, 옷은 아니다) 거기서도 가끔 본다. 괜히 반갑다. 며칠 전 언리미티드가 끝나고 무대륙 앞에서 남은 책을 싣는 폭스바겐 골프만 네 대 쯤 본 것과 비슷한 어떤 게 아닐까 싶다.



뭐 여튼 다시 후드 플리스 이야기로. 플리스라는 옷이 있다. 원래 등산용 옷인데 유니클로가 범 대중옷으로 대히트를 쳐서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옷이다. 플리스에는 하나같이 폴리에스테르 100%(혹은 그 비슷한 폴리 어쩌구)라고 적혀있지만 이것들은 전혀 다르다. 가끔 면 100%인데 얘네 티셔츠는 오천원인데 왜 쟤네는 이십만원이냐 사기꾼들...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다르니까 값이 다른 거다. 유니클로의 캐시미어와 말로의 캐시미어가 다르고, 자라의 실크와 에르메스의 실크가 다르다.

몬투라나 마무트, 노스페이스나 유니클로 그리고 저 위의 유씨 버클리 플리스는 고향은 다 같이 중동 어딘가의 땅 속일지 몰라도 그냥 고향만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재질이 같다고 K2 등반을 할 때 유씨 버클리 따위를 안에다 입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



오늘의 주인공 유씨 버클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최하위의 플리스다. 두껍고, 무거우며, 계속 보풀이 일어나고 쉬이 더러워진다. 몸의 수분을 매우 효과적으로 뽑아가기 때문에 계속 살이 건조해지며 정전기는 끊이지않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쁜 점은 하나도 따뜻하지 않다는 거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전혀 따뜻하지 않다. 생긴 모습의 압도적인 따뜻함과 대비되어 그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이유는 바람이 숑숑 들어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섬유는 두껍고 그게 헐겁게 짜여져 있다. 몬투라 노르딕 플리스의 실 하나 값 정도 밖에 안되지만(그건 정가가 337,000원이다) 그 실 한 올 정도의 보온을 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정직하다.

그래도 너무 멀쩡하기 때문에(보풀이 화수분같다, 옷은 항상 그대로다) 계속 사용한다. 안에 긴팔티 정도 입고 겨울에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두드릴 때 위에 걸친다. 물론 이는 무대 장치 같은 것으로로 효용은 별로 없지만 어깨를 누르는 무게에 몸이 긴장되기 때문에 추위는 약간 달아난다.



옷 공장 이야기를 살짝 더 붙여보면 지하에 그 옷 공장 창고가 있었는데 불이 난 적 있다. 활활 타오른 건 아니고 슬슬 타오르며 연기를 뿜어냈다. 위 사진의 옷 같은 게 탄 거다... 그건 정말 굉장해서 집이 4층이었는데 연기가 올라오길래 잠시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순식간에 어질~ 하는 게 느껴졌고 밖에서 휴지로 코를 닦아보니 새까만 검댕이 계속 묻어 나왔다. 담배 필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인 것과 비슷한 거다.

여기서 귀중한 교훈을 하나 말해주자면 혹시 불이 나면 저런 옷은 재빨리 벗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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