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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MMM과 H&M, 그리고 과연 어느 쪽이 질 샌더인가

by macrostar 201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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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와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와의 관계는 꽤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H&M이나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들은 시류에 맞춰 재빠르게 자신을 변신시켜가는게 생명이므로 메인 디자이너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크게 필요하지 않고, 있어도 실무자일테니 누군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디자이너 하우스들은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걸 아주 잘 만들고, 그러면 그게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따라오는 구조다. 그러므로 보다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필요하고 좀 더 세밀하게 콘트롤이 가능한 미래 계획이 필요하다.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 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체제는 사실 공고해 보였지만 사실 이렇게 디자이너 이름을 따르는 라벨링의 역사가 긴 것도 아니다. Louis Vuitton이라는 아저씨가 루이 비통을 만들었지만 그래봐야 19세기 말이다. 그리고 아직 공고화되지 않은 이런 라벨링의 역사에 최근 변화가 시작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느 순간, 그러니까 90년대 말 부터 이런 현상이 늘어났는데, 크리스찬 라크르와에서 크리스찬 라크르와가 짤리고, 질 샌더에 질 샌더가 없고, 헬무트 랑에 헬무트 랑이 없는 시절이 찾아왔다. 라벨에 붙어있는 어떤 사람의 이름은, 이미지와 시그널링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건 YSL에 YSL이 없고, 샤넬에 가브리엘이 없는 것과 다르다. 죽어버렸는데 뭘 어쩔거냐. 운이 좋으면 디자이너 본인이 임명한 후임자가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멀쩡히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크르와나 질 샌더는 약간 다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시뮬라크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면이 있다. 라프 시몬스라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만드는 질 샌더, 그리고 질 샌더라는 디자이너가 만드는 +J. 과연 어느 쪽이 더 '질 샌더'스러운가, 과연 어느 쪽이 지금 시점에 상표에 붙어있는 '디자이너' 질 샌더가 했을 작업을 보여주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질 샌더라는 이름이 붙어야 옳은가. 라벨에 적혀있는 '사람'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구찌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 내 다시 하이엔드 패션의 최전방에 새워 놓은 수훈을 세운 톰 포드가 나가버렸을 때 구찌에는 혼란이 찾아왔다. 당시 인터뷰나 보도 자료를 보면 4명 정도의 영 디자이너로 팀을 만들어 구찌를 꾸려나갈 거다, 걱정할 건 없다같은 이야기를 PPR에서 계속 흘렸었다.

이 실험은 매우 의미심장했던게 밀고 나갈 공고한 이미지가 있다면 이후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나 메인 디자이너 같은 게 딱히 불필요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얼마 가지 못했고, 결국 프리다 지아니니가 여성복, 남성복 디렉터 자리를 둘 다 꿰차면서 끝나게 되었다. 아직 상황이 설익은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Maison Martin Margiela(이하 MMM)는 Martin Margiela(이하 MM)가 만든 브랜드다. 유난히 기존 질서와 다른 작업을 많이 선보였고, 그런 만큼 선장의 자리가 중요한 브랜드다. 그러다가 2002년 이 회사는 렌조 로소가 이끄는 거대 청바지 회사 디젤에 팔렸다. 곧바로 여러 소문들(둘이 뭔가 맞지 않는다. MM이 패션에 실증을 내고 있다 등등)이 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 MM이 Raf Simons에게(거부했다), 그리고 Haider Ackermann에게(그도 거부했다) MMM의 디렉터 자리를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2009년 렌조 로소는 결국 'MM이 MMM에 나오지 않은 지 한참 됐다'는 내용을 공식화한다. 참고로 MM은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일도 안해서 그렇지 여전히 MMM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이름이 있다. 2015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다고 한다. (디젤 쪽에서 일 안한다고 소송을 걸거나 압박을 하거나 하지 않는 점이 좀 이상해 뭔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있기는 하다)

렌조 로소는 인터뷰에서 MMM에 대해 We have a new fresh design team on board라고 밝혔다. 이 디자이너들은 어쨌든 MM이 했을 법한 생각을 추적하며 MM이 만들었을 법한 옷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MMM을 가능한 같은 선상에서 확대/증폭시킨다. 이것은 사실 피카소 카피를 하던 사람이 나중에 피카소가 만들었을 법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다른 게 없다. 

하지만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 모래성같은 작업을 MMM 팀은 나름 잘 해내고 있다. 얼추 비슷한 예술의 분위기, 얼추 비슷한 일탈의 느낌. 디젤의 서포트 아래에서 이렇게 MMM은 창작자가 없는 창작품의 길, 아티스트가 없는 아트의 길을 걷는다. 그야말로 예술 따위, 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MMM의 2011 SS



여기서 더 재미있는 일이 시작되는데 이왕 MM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MMM은 공공연히 'MMM 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Elle에 실린 'Maison Martin Margiela Team'.



H&M과 콜래보레이션이 발표될 때도 이렇게 'Team'이라는 이미지로 등장했다. 이들은 분명 한 명, 한 명이라는 각각의 인격으로 나뉘어 질 것이다. 또 가끔씩 이름도 흘러나온다.


MMM Team의 일원인 Edouard Schneider, Guillemette Duzan, Denis Buffard.

그렇지만 이렇게 흘러나오는 이름은 그들에게는 프로필이 되겠지만 바깥의 사람들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저 위의 새하얀 두 개의 이미지처럼 이들은 MM을 재현해 내는 MMM 팀이라는 공동화된 초자아일 뿐이다. 이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하지만 현실이다. 당장 그 결과물을 신세계 명동점에만 가도 보고 만져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는 MMM이 H&M과 콜래보레이션을 할 거라는 뉴스가 나왔다. 양쪽 다 메인 디렉터라는 선장이 없이 한 쪽은 사라진 설립자의 이미지를 확대 증폭시키는 팀이고, 또 한 쪽은 트렌디의 이미지를 확대 증폭시키는 팀이다. 결국 이미지와 껍질만 남아있는 두 팀이 함께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거야말로 '과연 21세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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