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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클

시큰둥하게 삽시다

by macrostar 2017.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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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의 자살 사건으로 그 이름이 한참 회자되고 있길래 한번 써 본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딱히 별 말할 건 없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 패션과도 약간 관련이 있다. 


이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트위터에도 적었던 라디오 강좌 또 하나는 필화 사건이다. 후자의 경우 그 소설이 여타 다른 문제로 법정에 갔으면 몰라도 책이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구속이 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떤 책임감을 느낀다. 예컨대 장정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런 판결을 막지 못했다. 사실 "막아야 했다"는 말도 우스운게 그래야 된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은 기억이 많다.


결론적으로는 매우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몇 개의 사건들이 알려져 있다) 그래도 비판은 다른 방식이 되었어야 한다. 애초에 마광수를 감옥에 넣어 버리는 바람에 그가 이야기한 것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적절한 비판이 있고 또 마광수 본인도 그런 비판을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면 사회의 논의도 조금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그보다 더 원시적인 필화 문제에 머물러 버렸다.


어쨌든 오늘은 시큰둥하게 삽시다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 강연(혹은 방송?)을 들은 게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필화 사건(1992) 전일 수도 있고 후일 수도 있다. 맥시멈으로 잡아도 분명 교수로 다시 들어간 1998년 전의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뒤섞여 있어서 확신을 못하겠다. 당시의 나는 (지금과 비슷하게) 세상에 불만이 꽤 많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아는 것도 없고 별다른 생각도 없었고, (지금과 약간 다르게) 나라가 튼튼하고 부강하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 하고 있었던 거 같다. 즉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상당히 어설픈 시절이었다.


라디오로 들었던 강의는 정치에 관련된 거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데모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이게 다 자기랑 상관도 없는데 쓸데없이 관심들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시큰둥하게 살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며 굉장히 화가 났었다. 대체적으로 강자가 약자에게 선의로 뭔가 내주는 경우는 없다. 그건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라는 무력의 방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정치적인 문제에 의해 좌우된다. 지금 당장 임금이나 복지 문제로 회사와 싸움을 해도 더 위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뭔가가 정해져 있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이건 당연히 연결이 되는 문제다. 근데 앞의 문제만 이야기하면 되지 뒤의 문제가 왜 끼냐고 하는 건 애초에 잘못된 사고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강의가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시큰둥하게 살자는 이야기가 권위주의 타파와 연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각 개인의 안빈락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그게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도덕적 엄숙주의, 권위주의 그런 게 문제의 핵심이다. 사실 유교와 효의 나라에서 그런 거에 대한 인식도 별로 없었고, 뭔가 맘에 안드는 게 있는 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아 그게 권위주의가 만드는 문제였구나 라는 걸 인식하게 된 계기다. 


그리고 이 강의의 기억은 권위주의를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라는 이후의 생각과 또한 개인적인 몇 가지 사건과 기억과 연결되는 데 그런 건 생략하고 여튼 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남았다. 예컨대 "이러이러 해야 한다"라는 사회적 규율은 대부분 사회적 권위주의와 연결되고 그런 건 대부분 기존 권력 관계를 고착화 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런 오지랖들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거부감을 장착하게 된 건 역시 그때부터 였던 거 같다.  


이런 반 권위주의에 대한 생각은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다음에도 계속 되었다. 뭐 한때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야 하는 구습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예컨대 인간의 자유로움이란 한정된 양식이다. 한 개인이 멋대로 하는 게 자유로운 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더 넓은 사고의 폭을 가지며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게 더 자유로운 거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자각,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강남역 사건 같은 걸 겪고 나서야 가지고 있는 생각의 문제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되돌아 보게 된 게 사실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넓은 사고의 폭이라는 건 완전하고 안정된 균형이 이뤄진 후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얼한 모습이다. 사회 자체가 존재를 위협하고 있는 이들이 있고 현실적, 물리적 위협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는 단순한 말장난일 뿐이고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현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방식 중 하나가 된다.


특히 다양성 트렌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예컨대 최근 하이 패션 브랜드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은 이와 비슷한 종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당장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옷을 입었던 한국의 여성 또는 체첸에서 박해받는 게이 들만 생각해 봐도 애초에 발화의 자리 자체가 너무 다르다. 나라 간 차이, 경제 간 차이, 성별 간 차이, 인종 간 차이 등등 여러가지 변수들이 또한 그 안과 밖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런 게 무브먼트로 존재하기 에는 함정과 다른 유혹이 너무나 많고 불안정하다.


그럼에도 최근 이쪽으로 이야기를 계속 해 보는 건 적어도 옷은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입는다. 그게 바로 무기다. 인간은 아주 작은 계기로도 어떤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거기서 시작해 생각을 뻗어 나갈 수 있다. 반드시 전면적 개혁과 개선 만이 답은 아니다. 예컨대 어떤 정신적 혁명 같은 게 일어나 일순간 모든 사람들의 사고가 단번에 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쿤이 패러다임 시프트 이야기를 하면서 예로 들었던 게 천동설과 지동설이었는데 보다시피 아직도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 창조 과학 같은 걸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제 입었던 옷이 오늘 촌티나게 보일 수 있는 게 또한 패션이다. 아주 빠르게 취향과 습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 구습을 그런 식으로 묶어 촌티나게 보이게 하는 게, 놀림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요즘 다이어트라는 말이 그런 식으로 밀려나고 있는데 그런 걸 패션에서 롤 모델로 삼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일단은 그 정도가 지금 패션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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