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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마운틴 시크, 어글리 프리티, 고프코어 Gorpcore

by macrostar 2017.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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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몇 년 전부터 불어오는 트렌드들, 하이킹 부츠와 플리스, 캠핑 도구와 패딩 재킷, 아웃도어 타입의 레인코트와 벨크로, 각종 방수 섬유 이름이 적혀 있는 마운틴 재킷, 두꺼운 양말에 샌들 등등등이 모두 합쳐져 최근 Gorpcore라는 이름으로 통합이 되었다. 


예컨대 셀린느의 버켄스톡, 프라다의 테바 풍 샌들, 발렌시아가의 80년대 스포츠 브랜드 패딩 점퍼에서 가장 특징 없는 걸 뽑아낸 듯한 옷들, 지방시의 범백 등등이 모두 합친 새로운 트렌드를 뜻하는 용어고 간단히 말하자면 이전 유행인 놈코어의 확대 재생산이자 다음 타자 격으로 올해부터 이 말이 부쩍 등장하고 있다. GORP는 granola, oats, raisins, peanuts의 앞글자를 모은 단어로 트레일 같은 거 갈 때 챙겨가는 먹을 것들 믹스를 말한다. 



중고 매장에서 본 다음 3년 지나서 가봐도 그대로 있을 거 같은 단색 패딩은 이렇게 고프코어라는 트렌드의 핵심 타자가 되었다.



스타일이라는 말이 라이프웨어라는 말로 대체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보이는데 이전에 놈코어, 스타일이라는 말이 범적인 용어임에도 특정한 스타일링 방식을 일컫는 말로 축소되었다면 좀 더 생활의 구석구석을 커버하려는 말이고 좀 더 특정한 모습을 지칭하지 않으려는 말이다. 하지만 특정한 모습을 지칭하지 않을 수록 소비자는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아지고 제조사는 눈에 확 들어오는 키워드를 뽑아낼 수 없어 팔아먹기가 애매한 법이다. 그러므로 이 언어도 외연이 축소될 운명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번 고프코어는 안티 패션의 경향과 맥락을 함께 한다(링크). 잘 차려 입는려는 행위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막아내고, 멋대로 입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멋진 일인가에 초점을 둔다. 대신 전통적인 멋짐의 자리를 기능이 대신한다. 즉 기능적인 요소를 나열하는 방식을 패션화한 거라고 보면 매우 간단하고 그러므로 이번 남성복 패션쇼의 조류(링크)가 나오게 된 거다. 대표적으로 이번 발렌시아가를 생각하면 된다. 이상하게 차려 입었고 가족과 함께 입을 수 있는 옷이지만 그렇다고 스타일리시를 표방하지 않는다. 품질 좋은 옷을 구색에 맞게 차려 입으면 되는 거다. 



사실 이 배후에는 매우 스펙 중심 주의가 있기도 하다. 패셔너블한 옷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부 - 트렌드와 컬러, 알맞은 옷의 조화에서 시작해 핏과 cm 차이가 만드는 미묘함까지 - 가 필요하다.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저게 왜 멋지다는 건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테크 플리스, 워터프루프 등등의 기능은 수치화되어 있고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예컨대 시간당 20mm의 비에도 잘 버티는 레인코트는 10mm/h가 넘으면 물이 새는 옷보다 당연히 점수가 높다. 더 좋은 옷이므로 더 멋지다.


뭐 이런 건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하고 기능 그 자체가 고프코어의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발렌시아가의 이번 패션쇼가 알려주듯 원하는 걸 입어, 무슨 상관이야!가 이 조류의 핵심이기도 하다. 좋게 보자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들을 흐트려 놓으며 즐거워하는 소년의 마음으로의 회기고 TPO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나머지 시간을 패션을 가지고 (즐겁게) 망쳐 놓으며 노는 방법이다. 


좋은 옷을 입고 싶지만 패셔너블한 모습에 자신이 없거나 아예 반감이 있을 때 이건 적절하게 기능한다. 옷을 못 입는 게 이미 트렌드가 되어 있으니 옷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잘 못 입는 사람도 상관이 없다. 자꾸 대디 코어를 옷 잘 입는 아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멋대로 입어도 괜찮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멋대로 입자 그게 재미지!에 더 가깝다. 셔츠와 바지, 구두와 시계 등등을 그림 같이 매치하고, cm도 틀린 게 없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스타일리시한 대디를 발로 뻥~차버리고 마음껏 비웃으며 멋대로 입자! 가 바로 이 길이다. 


디자이너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사실 고프코어를 캣워크 위로 끌어온 발렌시아가나 베트멍의 시즌 옷을 사 입을 정도라면 패션에 어느 정도는 숙달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어떤 걸 가져다 어떤 식으로 입어도 적절한 롤업과 적절한 지퍼 위치 등등 여기저기 건들면 자연스럽게 구 타입의 패셔너블함이 흘러 나와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걸 피하기 위해 뎀나 즈바살리아의 옷을 모두 풀 착장하면 그냥 멋대로 입음이 완성되어 버린다. 빈틈 따위는 주지 않는 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조크로 기능할 거다.



대체 왜 이런 걸 멋진 아빠라고 표현 하는 걸까. 멋진 거 따위 상관하지 않는 아빠다. 



저런 모습을 하기 위해 고급 부티크를 찾아갔고, 아주 비싼 비용을 들였다는 거 자체가 또한 이런 트렌드의 핵심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나온 안티 패션의 조류, 전통적으로 혹은 매우 트렌디하고 스타일리시하게 멋지게 차려 입음을 놀리는 방식들 중에서는 가장(너무)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그게 좀 문제라는 거고. 


사실 가장 냉정하고 적확하게 이 트렌드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 유명한 한국 아저씨들의 등산복 패션의 태도와 정신이(그분들이 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세계 트렌드의 한 가운데에 등장하고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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